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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흐름17

조선왕조, 지덕체를 갖춘 문종 세종의 며느리들은 때때로 상식을 벗어난 행보로 궁궐을 술렁이게 했다. 특히 세종이 오랜 절차를 거쳐 간택한 세자빈이 연달아 폐출되는 사태는 당시 조정과 백성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큰 파문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421년 세종은 장남 이향을 왕세자로 책봉했고, 세자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첫 혼례를 올려 김씨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그러나 혼인은 길지 못했다. 김씨가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 비술을 익혔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혼례 후 3년 만에 폐위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남편의 눈길을 끈 궁녀 효동과 덕금의 신발 재를 술에 타 마시면 사랑을 되돌릴 수 있다는 따위의 미신을 시녀에게서 배웠다는 진술이 문제였다. 김씨가 실제로 시행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세종은 국모가 될 인물의 품격에 어긋난다며 단호히 결단.. 2025. 8. 13.
조선왕조,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 태종의 뒤를 이은 이는 셋째 아들 충녕이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토론을 즐기던 그는 밤을 새우며 경전을 파고들었고, 태종이 “밤에는 불을 끄고 쉬라”고 타이를 만큼 학구적이었다. 반면 장자 양녕은 세자로 책봉된 뒤에도 기질이 거칠고 공부에 성실하지 못해 신하들의 신망을 잃었다. 경회루 연회에서 충녕이 유교 경전을 막힘없이 읊자 태종이 감탄했고, 곁에 있던 양녕에게 “어찌 학문이 이만 못하냐”라며 핀잔을 주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결국 양녕은 사사로운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1418년 폐세자가 되었고, 충녕 이도가 새로 세자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태종은 상왕을 자처하며 스스로 물러났고, 스물두 살의 충녕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으로 즉위했다. 태종이 다져 놓은 권력 기반이 있었기에 세종은 초반부.. 2025. 8. 12.
조선왕조의 시작, 태조 이성계(2) 4. 끝나지 않은 왕자의 난1차 왕자의 난 이후 실질적인 권력을 쥔 이방원은 곧바로 왕좌에 오르지 않았다. 스스로 내세운 명분이 ‘적장자 계승’이었기에, 첫째 형이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차례상 둘째 형 이방과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이다. 이렇게 1398년, 이방과가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정종으로 즉위했다.정종은 고려 말부터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왜구 토벌 전선에서 활약했던 무장이었지만, 권력욕이 거의 없었고 정치적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왕권 안정을 꾀했는데, 그중 하나가 ‘분경 금지령’이었다. 이는 관리들이 상급자나 권력자의 집을 출입하며 청탁과 뇌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막는 일종의 로비 금지 법령이었다. 하지만 실제 시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정종은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 2025. 8. 11.
조선왕조의 시작, 태조 이성계(1) 1392년,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인 조선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18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고,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무려 518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장기간 존속한 왕조이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를 이해할 때는 주요 시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일반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지만, 세기를 기준으로 조금 더 세분해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14~15세기: 국가 체제가 정비된 시기로, 태조 이성계부터 성종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시기에 조선의 기틀이 완성되었습니다.16세기: 연산군에서 선조에 이르는 시기로, 사림이 정국을 주도했으나 내부 분열로 인해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됩니다.17세기: 광해군에서 숙종까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큰.. 2025. 8. 10.
[한국사] 고려의 최후 1. 무신정권의 붕괴와 원과의 관계 재편1258년, 약 60년간 고려를 지배했던 최씨 무신정권은 무오정변을 계기로 막을 내립니다.최항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던 최의가 김준·유경 등 신흥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이었죠.이 시점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왕권을 회복한 고종은, 이어진 대몽 항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태자를 몽골로 파견합니다.그 무렵 몽골 내부에서는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황위 계승을 놓고 대립 중이었는데, 태자는 쿠빌라이 편에 서기로 결정합니다.쿠빌라이는 30년간 항전하던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온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하늘이 내린 뜻이라 강조했습니다.그는 태자의 요청 여섯 가지를 수락했고, 그중 ‘불개토풍(고려의 풍속을 바꾸지 않음)’ 약속은 이후 고려 왕조 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2025.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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