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신정권의 붕괴와 원과의 관계 재편
1258년, 약 60년간 고려를 지배했던 최씨 무신정권은 무오정변을 계기로 막을 내립니다.
최항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던 최의가 김준·유경 등 신흥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이었죠.
이 시점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왕권을 회복한 고종은, 이어진 대몽 항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태자를 몽골로 파견합니다.
그 무렵 몽골 내부에서는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황위 계승을 놓고 대립 중이었는데, 태자는 쿠빌라이 편에 서기로 결정합니다.
쿠빌라이는 30년간 항전하던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온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하늘이 내린 뜻이라 강조했습니다.
그는 태자의 요청 여섯 가지를 수락했고, 그중 ‘불개토풍(고려의 풍속을 바꾸지 않음)’ 약속은 이후 고려 왕조 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태자가 귀국한 뒤 원종으로 즉위하고, 쿠빌라이도 황위에 오릅니다. 원종은 친몽 정책을 추진하며 왕권 회복을 꾀했으나, 무신정권 잔존 세력인 김준이 강화도 철수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1268년 원종은 김준을 제거하고, 1270년 개경 환도로 무신정권을 완전히 종식시킵니다.
그러나 친몽정책에 반발한 삼별초가 봉기합니다. 대몽 항쟁의 핵심 전투병력이던 삼별초는 끝내 1273년 여몽 연합군에 패배했고, 이듬해 원종이 사망하자 충렬왕이 즉위합니다. 충렬왕은 이미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어 있었으며, 원나라는 국호를 ‘대원’이라 선포하고 고려를 제후국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왕호 앞에는 ‘충’자가 붙어 원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게 되었죠.
2. 부원세력의 득세와 개혁의 시도
원은 고려에 각종 전쟁물자를 요구했고, 일본 원정에도 고려를 동원했습니다. 또한 ‘공녀’라 불린 젊은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가 궁녀·첩·노비가 되었죠. 이런 상황 속에서 원에 기대어 권세를 얻은 부원세력이 성장합니다. 그 대표가 기황후의 오빠 기철입니다.
부원세력은 토지를 빼앗고 백성을 노비로 만드는 등 횡포를 부렸습니다. 개혁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원의 간섭이 강한 상황에서 뿌리 뽑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14세기 중반, 공민왕이 즉위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는 즉위 직후 몽골식 복장·변발을 금지하고 기철을 제거했으며, 빼앗긴 땅을 돌려주었습니다.
이 시기 원은 내부 혼란과 재정난으로 약해지고 있었고, 한족의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는 등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떠돌이 승려 신돈을 발탁해 권문세족이 탈취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했으며, 성균관을 확장해 유학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은 지방 출신 중소 지주들이 성장해 중앙 정치에 진출했는데, 이들이 바로 ‘신진사대부’입니다. 이색·정몽주·정도전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또한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한 최영·이성계 같은 신흥 무인 세력도 부상했습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개혁을 목표로 뜻을 함께하게 됩니다.
3. 위화도 회군과 왕조 교체
14세기 말, 명나라는 고려 북방 영토를 자기 땅이라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합니다. 우왕과 최영은 이에 반발해 출정을 추진했으나, 이성계는 네 가지 반대 이유를 들어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우왕은 출병을 강행했고, 이성계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의 위화도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이성계는 역사적 결단을 내립니다. 1388년, 군을 돌려 개경으로 향한 ‘위화도 회군’입니다. 그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했으며, 이어 창왕과 공양왕을 차례로 옹립하며 실권을 장악합니다.
개혁 방향을 두고 정계가 갈립니다. 정도전·조준 등 급진파는 성리학적 새 왕조 건설을 주장했고, 정몽주 등 온건파는 고려를 지키면서 개혁하자고 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하여가>를 지어 정몽주를 설득했지만, 정몽주는 <단심가>로 충절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합니다.
1392년, 공양왕이 폐위되고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조선 왕조가 열립니다.
474년간 이어진 고려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한반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