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며느리들은 때때로 상식을 벗어난 행보로 궁궐을 술렁이게 했다. 특히 세종이 오랜 절차를 거쳐 간택한 세자빈이 연달아 폐출되는 사태는 당시 조정과 백성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큰 파문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421년 세종은 장남 이향을 왕세자로 책봉했고, 세자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첫 혼례를 올려 김씨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그러나 혼인은 길지 못했다. 김씨가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 비술을 익혔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혼례 후 3년 만에 폐위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남편의 눈길을 끈 궁녀 효동과 덕금의 신발 재를 술에 타 마시면 사랑을 되돌릴 수 있다는 따위의 미신을 시녀에게서 배웠다는 진술이 문제였다. 김씨가 실제로 시행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세종은 국모가 될 인물의 품격에 어긋난다며 단호히 결단했다. 술법을 일러 준 시녀는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되었고, 세자빈 김씨는 작호를 빼앗긴 채 내쳐졌다.
첫 번째 폐출 이후에도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종은 널리 후보를 물색해 봉씨를 새로운 세자빈으로 삼았으나, 이 혼인 역시 파국을 맞는다. 봉씨는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한 채 불안과 질투에 사로잡혔다. 특히 승휘 권씨가 임신하자 마음의 균형이 더욱 무너졌다. 세종이 “후사가 생기니 경사 아닌가”라고 타일렀으나 위안이 되지 못했다. 봉씨는 가짜 임신을 꾸미고, 분노를 참지 못해 궁인을 심하게 벌주기도 했다. 술에 취해 뜰에서 여종에게 업혀 다녔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다. 그러다 결국 궁녀 소쌍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당시 궁녀는 혼인이 금지되어 또래끼리 정을 나누는 일이 드물지 않았지만, 세자빈이 그 주인공이라는 점은 달랐다. 세종은 “입에 담기 수치스럽다”고 개탄하며 봉씨를 폐출했다.
세 번째 혼인은 권씨와의 연분이었다. 권씨는 단정하고 온화하여 주변의 신망을 얻었고, 혼인 5년 뒤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훗날 단종이다. 그러나 권씨는 산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자는 잇따른 상처를 겪은 뒤 더는 정실을 들이지 않았다. 훗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비가 공석인 채 정사를 돌본 까닭에, 조선의 임금 가운데 드물게 재위 기간 내내 정식 왕비가 없었던 사례로 기록된다.
한편 이향은 오랜 세자 수업을 통해 문무를 고르게 닦았다. 세종의 눈병이 악화한 뒤 대리청정을 맡아 국정을 실습했으며, 측우기를 비롯한 실용 기술 개발에 뜻을 두었다. 화약과 병기에도 숙달되어 즉위 직후 화차 운용을 개선하고 신기전을 대량으로 운용하게 했다. 기동성을 높여 평시에는 방어, 전시에는 공격 전환이 쉬운 체계를 갖춘 점이 특징이었다. 1451년에만 수백 대가 제작되어 요충지에 배치되었다는 기록이 남는다. 그는 문장과 음악에도 밝았고, 활쏘기와 기마에도 능했다. 용모는 풍채가 좋고 수염이 무성하여 사대부들 사이에서 미덕으로 평가받았으며, 외국 사신들 또한 위엄 있는 풍모를 칭찬했다.
1450년 서른일곱에 즉위한 그는 5대 임금 문종이 되었다. 문종의 통치는 안정과 정비에 방점을 찍는다. 세종 대의 제도와 사업을 점검하고, 인사와 군제를 손보며, 재정의 누수를 막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치세는 짧았다. 모친 소헌왕후와 부친 세종의 삼년상을 연이어 치른 뒤 건강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종기와 합병증이 도져 강녕전에서 승하했을 때 나이는 서른아홉, 즉위 2년 만이었다. 어린 아들 단종을 남겨둔 채 그는 고명대신들에게 국정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폐출 절차 또한 임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대간과 예문관이 관련 사실을 조사해 장계로 올리고, 의금부가 신문하여 죄목을 확정한 다음, 예조가 의례적 후속 조치를 정리해 반포했다. 세종은 사사로운 분노로 결정하지 않으려 각 관청의 의견을 모으고, 기록으로 남겨 추후의 준례가 되게 했다. 이는 왕실 혼례와 궁중 기강을 바로세우려는 의지이자, 법 절차에 따른 통치를 지향한 태도의 표현이었다. 봉씨 사건 때도 소문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대조했으며, 소쌍을 비롯한 궁인들에게 책임을 물어 문책과 처벌을 병행했다. 권씨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생전 과장된 행실 논란이 없었고, 세자빈으로서 내명부를 정돈하고 세자의 일상을 보좌했다. 세조가 단종을 내치면서 권씨의 시호와 예우가 일시 박탈되었으나, 성종 대에 복위되어 현덕왕후로 추존되었다. 문종은 짧은 치세에도 실무형 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호조와 공조의 장부를 대조해 수납 체계를 정비했고, 병조에는 무기와 말의 수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장계를 의무화했다. 변방 진영에는 화차와 신기전을 권역별로 할당하고, 공격과 후퇴 동선을 지도로 묶어 훈련 주기를 정했다.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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