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꺾여버린 어린 군주
1452년 열두 살의 단종이 즉위했을 때 조정에는 그를 보호할 대왕대비도, 국정을 임시로 맡을 왕비도 없었다. 어머니를 잃고 곧 아버지마저 떠나보낸 소년 왕 곁에는 유언으로 지명된 고명대신들만 남았다.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는 인사 문서를 정리해 올리고, 세자가 붓끝으로 낙점하는 형식의 정사를 진행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황표 정사’라 불렀다. 자연스레 권력이 두 정승에게 쏠리자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칼끝을 갈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가로막힌 거목은 4군 6진 개척을 지휘하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을 주도한 원로 김종서였다.
1453년 가을밤, 수양대군은 측근과 병력을 이끌고 김종서의 집 문 앞에서 말고삐를 잡았다. 인사를 나오던 김종서가 봉문을 열려는 찰나, 그의 눈앞에 작은 서찰이 내밀어졌다. 글귀를 비추려 달빛 쪽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철퇴가 머리를 내리쳤다. 아들이 놀라 붙들었으나 곧 칼에 쓰러졌다. 거사는 그대로 궁궐로 이어졌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역모를 미리 막았다며 상주했고, 한명회의 손에는 잡아들이고 베어낼 이름이 빼곡한 살생부가 쥐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 철퇴가 연달아 휘둘러지며 피비린내가 온 골을 뒤덮자 인근 백성들은 재를 뿌려 냄새를 없앴고, 그 지명이 훗날 재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머리를 맞은 김종서는 기적처럼 목숨이 붙어 있었다. 단종을 염려한 그는 여인 가마로 몸을 숨겨 도성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닫혀 사돈 집으로 피신했다. 수양대군은 다음 날 미처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양정을 보내 마무리를 지시했다. 김종서는 “정승이 걸어갈 수 없다”며 초헌을 내라 명했고, 그 자리에서 칼에 베였다. 하룻밤 사이 정국이 뒤집힌 이 사건을 후대는 ‘계유정난’이라 부른다. 승자의 기록은 ‘난을 바르게 진압했다’는 뜻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대군이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한 쿠데타였다.
권력을 거머쥔 수양대군은 가담 세력을 공신으로 올리고 반대파를 죄인으로 몰아 조정의 판도를 바꾸었다. 바로 즉위하지 않고 영의정을 맡아 병권과 정권을 한 손에 쥔 채 섭정을 거치며 명분을 쌓았고, 1455년 마침내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의 혈통은 그 무엇보다 정통성이 강했다. 세종의 장자 문종이 적장자로 즉위했고, 그 외아들 단종 또한 적장자로 왕위에 올랐으니 형식과 명분이 완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댈 큰 어른이 없었다.
집현전 출신의 학자와 사류는 소년 군주의 폐위를 좌시할 수 없었다. 이들은 목숨을 건 복위 도모에 나섰으나 끝내 사전에 발각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성삼문·하위지·이개·박팽년·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은 지조를 지킨 충신으로 추숭 되어 ‘사육신’이라 불린다. 반대 세력이 끊기지 않자 세조와 공신들은 영월로 유배된 단종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혹시 또다시 복위 거사가 벌어질까 경계한 그들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향하던 압박과 협박이 거듭되는 가운데 1457년 결정적인 명령이 내려왔고, 열일곱의 어린 임금은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전해 오기를, 목이 졸린 단종의 시신을 누구도 거두지 못하게 세조가 엄명을 내리자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월 호장 엄흥도는 “옳은 일이라면 화가 와도 감내하겠다”며 아들과 함께 주검을 정성껏 수습해 암장했다. 단종은 폐위된 채 세상을 떠나 시호도 받지 못해 오랫동안 노산군으로 불렸고, 세월이 두 세기 넘게 흐른 뒤에야 복권되어 오늘 우리가 아는 왕의 이름을 되찾았다. 소년 군주에게 씌워진 비극은 정통성이 꺾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정통성을 지켜 줄 제도와 어른이 부재했기 때문에 더 가혹했다. 그의 짧은 생애는 권력이 명분을 앞설 때 국가가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또 그 상처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가 역사를 이어 주는지를 묻고 있다.
또한 황표 정사는 임시방편이었다. 정무 경험이 없는 소년 임금에게 결정을 강요하지 않고, 대신들의 합의 중 한 사람에 표시를 해 올리면 그대로 재가하는 형태였으나,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면 군주의 권위가 공허해지는 부작용이 따랐다. 수양대군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병조와 이조의 인사권을 손에 쥐면 조정의 맥이 자연히 자신에게 흘러들 것이라 계산했고, 정난 이후 실제로 그 그림을 그대로 현실로 만들었다. 한명회 등 측근은 인사와 군기를 장악해 반대 세력의 뿌리를 끊었고, 집현전은 흩어졌다. 단종의 이후는 짧지만 깊다. 영월 청령포와 관풍헌에 남은 지명과 전승은 백성들이 기억으로 그를 지켜냈음을 말해 준다. 장례는 은밀했으나 장릉으로 정비되어 제향이 이어졌고, 숙종 대에 복위가 이뤄지면서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돌아왔다. 이 서러운 역정은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운다. 강한 정통성도 제도의 보호와 어른의 책임이 없으면 바람 앞 등불이 된다. 권력은 명분을 앞세워야 하고, 명분은 힘에 기댈수록 빨리 닳는다. 소년 왕의 비극을 기억한다는 것은, 약자를 지킬 안전장치를 끊임없이 가다듬는 일과 같다. 역사는 그 점에서 되풀이를 거부하는 교사다. 또 다른 충절로 불린 ‘생육신’의 은둔과 저항 문학도 그 겨울의 자취를 전한다. 김시습을 비롯한 선비들이 권력과 거리를 두고 시문으로 의리를 지키려 한 사실은 오늘에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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