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8년,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이 왕위를 이었고 역사에서는 8대 임금 예종으로 기록된다. “왜 장자가 아닌 차자가 즉위했는가”라는 물음은 의경세자의 요절에서 출발한다. 세조의 적장자였던 의경세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어 정식으로 세자 교육을 받았으나 원인 불명의 병세로 스무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자을 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후일 자을 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고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한다. 종법의 원칙대로라면 장손인 월산대군이 종계를 잇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당시의 시점에서 월산대군은 아직 나이가 어렸고 국정의 중추를 맡기기에는 경험과 기반이 부족했다. 세조는 국가의 연속성과 안정을 우선시하여 성인이며 군사와 예악, 문무에 두루 익숙한 차남 해양대군을 세자로 삼았고, 그 결과 열아홉의 나이로 예종이 즉위했다. 세조 말년에 마련된 원상제는 이 과도기의 안전장치였다. 국왕이 병약하거나 국정 운영에 공백이 생길 때 원상이라 불린 원로 대신들이 승정원에 모여 합좌로 정무를 처리하는 규범인데, 예종은 즉위 직후에도 이 체계를 활용해 신속히 국정을 수습했다. 이 제도를 통해 신숙주와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 원로들이 행정의 관성을 이어가며 조정의 동요를 최소화했다.
예종 개인은 강단과 실무 감각을 겸비한 군주로 평가된다. 즉위 전부터 그는 “권세가 신하로 기울면 기강이 무너진다”는 소신을 드러냈고, 세조도 “세자는 육예에 통달했다”며 후계자의 기량을 치하했다. 묘호를 정할 때 신하 다수가 ‘신종’을 건의했음에도 예종은 아버지의 공적과 제도 정비의 성과를 들어 건국 군주에게만 붙이던 ‘조’ 자를 올리는 결단을 내렸고, 그리하여 세조라는 묘호가 확정되었다. 국정에서는 군정의 재점검과 법제 정비, 경국대전 편찬의 추진을 병행했다. 세조 대 착수된 대전 편찬 작업은 예종 대에도 속도를 냈고, 이후 예종의 갑작스러운 붕어 뒤에는 성종 대에서 최종 완성되어 조선의 표준 법전으로 정착한다.
예종 재위가 짧았음에도 강하게 각인된 사건이 이른바 ‘남이의 옥’이다. 남이는 태종의 딸 정선공주의 손자로, 젊은 나이에 무과 장원과 공신 책록을 거쳐 병조판서에 오른 기린아였다. 세조 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명성을 떨쳤으나, 그 공과 명망이 신구 공신 세력 간의 질시를 불러왔다. 세조가 승하하고 정국이 재편되는 틈에 남이는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는 곧 그를 표적으로 삼는 명분이 되었다. 어느 밤 임무를 보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남이가 “묵은 것을 씻고 새 것을 부르는 조짐”이라는 말을 내뱉었고, 이를 곁에서 듣던 유자광이 예종에게 보고하며 역모의 혐의를 씌우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남이는 처음에는 무고를 주장했으나, 그가 한명회 등 구공신을 험담한 정황이 드러나자 정국은 급격히 그에게 불리하게 기울었다. 혹독한 국문 끝에 그는 사형을 당했고, 유자광은 공신 반열에 올랐다. 실제로 남이가 정변을 기도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지만, 예종대 권력 지형 구공신과 신공신의 경쟁 속에서 직설적 성격과 빠른 출세가 그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남이 사건을 계기로 신공신 세력은 힘을 잃고 한명회로 상징되는 구공신의 영향력이 재확인되었다.
예종은 한편으로 미완의 과제를 밀어붙였다. 경국대전 편찬을 계속 감독하여 조목별 정합성과 집행 가능성을 점검했고, 문무 관원의 인사와 군기 정비를 통해 세조 대 만들어진 틀을 실제 행정의 언어로 굳히려 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너무 짧았다. 즉위 1년 2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면서 조정은 다시 중대한 결정을 앞두게 된다. 왕위의 승계 문제였다. 예종에게는 어려서 얻은 인성대군이 있었으나 장순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 아들 또한 세 살 무렵 요절했다. 뒤이어 안순왕후 사이에서 제안대군이 태어났지만 예종 붕어 당시 겨우 네 살에 불과했다. 자연스레 시선은 먼저 세상을 떠난 의경세자의 두 아들, 즉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에게 쏠렸다.
두 형제는 세조의 각별한 손자로 자라며 활쏘기와 마술, 경서와 역사, 예악과 문장을 두루 익혔다. 원칙상 장손인 월산대군이 앞설 수 있었으나, 건강과 기질, 그리고 국정 운영의 지속 가능성을 따져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자을산군을 지목했다. 이는 단지 사적인 총애가 아니라 정치적 현실 감각에 따른 선택이었다. 월산대군은 문학과 예술적 기질이 풍부했으나 몸이 약하고 실무형 국정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었고, 반대로 자을 산군은 학문 성취와 인품이 안정적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더구나 예종의 요절로 다시 공백이 생긴 국정은, 수렴청정 체제 아래에서도 유연하게 조정과 소통이 가능한 군주를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자을 산군이 조선 9대 임금 성종으로 등극하고,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초기 국정을 보좌했다. 성종은 즉위 후 조부 세조의 제도적 유산을 단단히 다지고, 훈구 중심의 질서 위에 사림을 점진적으로 등용하여 왕도 정치의 균형을 모색했다.
예종 대의 정치사는 짧지만 몇 가지 분명한 인상을 남긴다. 첫째, 연속성의 정치다. 세조가 만든 원상제와 각종 표준 절차를 즉위 직후 그대로 작동시켜 정국의 급전을 막았다. 둘째, 명분과 실용의 접합이다. 세조의 업적을 근거로 묘호에 ‘조’를 올리는 결단은 권력의 정통성 서사를 재정렬하는 행위였고, 동시에 법전과 군정의 실무 손질은 그 서사를 작동하는 제도로 뒷받침했다. 셋째, 권력 균열의 비용이다. 남이의 옥은 인사와 정보, 소문 정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보여 주었고, 이후 성종 대로 이어지는 인재 등용의 기준과 언관 제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결국 예종은 긴 재위가 아니었음에도 과도기의 균열을 봉합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제도적 다리를 놓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다리 위로 성종이 걸어 나와 조선 전기의 법제·학문·문화가 비로소 균형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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