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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흐름

조선왕조, 태평성대 성종

by 열매와 꿈나무 2025.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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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의 즉위는 준비된 계승이 아니라 급전의 결과였다. 겨우 열세 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세자 수업을 밟을 여유도, 아버지 임금의 그늘에서 국정을 배울 시간도 없었다. 적장자도 아니었다. 형 월산대군과 사촌 제안대군을 제치고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니 스스로 통치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다행히 곁에는 노련한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있었다.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초기 국정을 안정시키고, 원상제를 가동해 원로 대신들의 합좌 체계를 굴려 어린 군주가 국정 리듬을 익히게 했다. 이 과도기 장치는 예종 대보다 한층 촘촘히 작동했고, 성종은 그 틀 안에서 빠르게 배우며 성장했다.

 

성종이 택한 학습법의 중심은 경연이었다. 그는 낮의 정규 강론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밤에도 신하를 불러 보충 토의를 열었는데, 이를 야대라 했다. 나이가 지긋한 재상들이 체력적으로 버거워할 정도로 강행군이 이어지자 성종은 일정 조정과 조퇴를 허용해 배려를 보였다. 경연의 장점은 단순한 강독을 넘어 정책 토론이었다. 임금과 신하라는 상하의 위치는 유지하되, 스승과 제자라는 학문적 역전이 허용되어 비판과 대안이 활발히 오갔다. 성종 대 경연은 빈도와 밀도에서 조선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그 과정에서 군주의 학식은 물론 정치 감각과 문제 해결력이 함께 다져졌다.

 

 성종은 성인이 되자 과감히 고삐를 당겼다. 먼저 수렴 국면의 상징이던 원상제를 정리하고, 문한 기능을 전면 개편했다. 세조 때 설치되었던 홍문관을 단순 도서 보관 중심에서 연구·자문 기관으로 재설계해 집현전의 전통을 실질적으로 부활시켰다. 홍문관은 경연 실무를 맡으며 사간원·사헌부와 함께 언론 삼사로 기능했고, 삼사의 상소·논박·간쟁이 국정의 견제 장치로 자리 잡았다. 이와 연동해 성종은 사가독서제를 정착시키고 한강 남쪽에 독서당을 세워 관료가 일정 기간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도록 제도화했다. 독서당은 훗날 동호로 옮겨가며 지명과 다리 이름에 흔적을 남겼다. 이런 지적 인프라 위에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국가 프로젝트급 서적이 잇달아 간행되었고, 행정과 학문의 공진화가 진행됐다.

 

 법제 완성은 성종 치세의 결정판이었다. 세조 대에 착수한 《경국대전》을 성종 대에 정비·교감·반포하여 국가 운영의 ‘표준 매뉴얼’을 확정했다. 관청별 직임, 형벌과 소송 절차, 인사·재정·군정의 규범을 일목요연하게 묶은 이 법전은 이후 조선의 행정 언어가 되었고, 주먹구구식 관행을 법의 절차로 흡수했다. 성종은 조문을 현실에 맞게 손보는 데 각별히 신경 써 시행의 실효성을 확보하려 했다.

 

 사회의 이념적 방향도 선명해졌다. 성종은 유교적 예치 강화를 목표로 혼인 규제를 정비하고, 근친·동성동본 혼인을 엄격히 금했다. 화장 금지와 장례 의례의 표준화, 명절 제사의 예법 구분, 향교와 서원·서당을 통한 교화와 학습의 일상화도 추진되었다. 관청에는 효·제·충을 강조하는 교본과 강습 체계가 배포되었고, 지방 수령의 풍속 교정 임무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기조는 정희왕후의 안정적 수렴과 훈구 원로의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으나, 친정이 본격화되면서 성종의 주도적 의지로 재구성되었다.

 

 권력 지형의 균형 또한 성종의 설계 대상이었다. 반정과 제도 정비의 공으로 정국을 주도하던 훈구파는 강력했지만, 비대해진 이해관계와 사사로운 축재는 견제의 필요를 낳았다. 성종은 지방에서 성리학을 연마하던 사족 학맥—사림—을 점진적으로 등용했다. 김종직을 정신적 구심으로 삼은 인물들이 삼사에 진출해 언론 기능을 강화하고, 부정과 월권을 겨냥한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성종은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도록 탕평의 손놀림으로 균형을 맞췄다. 훈구의 실무 역량과 사림의 도덕 명분을 동시에 활용하며 왕권을 축으로 양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이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국정의 안정과 개혁의 활력을 동시에 가져왔고, 장기적으로는 사림이 공론장을 장악하는 기반이 되었다(훗날 연산군 대의 사화로 긴장이 폭발하지만, 출발점은 성종 대의 제도적 포석이었다).

 

 군사와 변방에 대한 관심도 놓치지 않았다. 성종은 북방의 여진 세력을 상대로 소탕과 회유를 병행하고, 요충지의 보·진·읍을 재정비했다. 진관 체계의 운영을 현실화하여 각 진이 인근 고을을 방어하도록 연결하고, 화포·화살·곡식의 비축량을 장부로 상시 점검하게 했다. 수군 진영에도 정기 점호와 장비 수리 규정을 내려 평시 유지 능력을 끌어올렸다. 이러한 조치들은 즉각적인 전과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경선의 상시 안정성을 높이는 ‘관리형 군정’이었다.

 

 재정과 행정의 현장도 촘촘히 손봤다. 토지 대장과 호적을 주기적으로 대조해 누락을 줄이고, 공납 품목의 과다와 폐단을 줄이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 창고의 출납 장부를 표준화하고 감사의 순회 점검을 강화하여 세입·세출의 누수를 줄였다. 관원의 선발·승진에 대해서는 문무별 시험·고과 체계를 정비해 일정한 기준을 세웠고, 무과의 실기와 문과의 경서·시무 능력을 균형 있게 평가하도록 했다.

 

 문화적으로는 학문과 예악의 융성기가 펼쳐졌다. 성종은 음악·의례·문장을 정비해 궁중과 지방의 의식이 일정한 격을 유지하도록 했고, 한글·한자 문헌이 함께 간행되면서 지식의 접근성이 넓어졌다. 여성과 아동의 보호, 민간 신앙의 과도한 폐단 시정 등 사회 정책도 점진적으로 손을 봤다. 이는 급격한 억압이 아니라 제도와 교육을 통한 유연한 교정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성종의 강점은 ‘운영’이었다. 그는 새로운 제도를 마구 만들기보다, 앞선 임금들이 개척해 놓은 틀—세종의 학예, 문종·세조의 군정·법제—을 현실에 맞춰 정리하고 완결하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그의 치세는 화려한 일격보다 안정된 호흡으로 기억된다. 백성의 체감은 곡식과 세금, 병역과 치안, 재판과 기록 같은 일상의 영역에서 나타났고, 많은 이들이 “나라가 제 궤도로 굴러간다”는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태평성대’라 부르는 풍경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물론 그 평화는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다. 왕권의 리더십, 삼사의 언론, 훈구와 사림의 균형, 법전과 절차, 학습과 토론의 일상화가 엮인 결과였다.

 

성종은 선왕들이 닦아 놓은 자산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 자산을 표준으로 묶어 체계로 만들고, 제도가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끝없이 문답하고 수정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무언가를 처음 만든 군주”라기보다 “많은 것을 제대로 굴린 군주”로 남는다. 그가 만들어 낸 안정의 시간은 후대의 변화와 갈등을 흡수할 여지를 남겼고, 조선 전기의 국가 시스템은 이 시기에 비로소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태평성대는 우연한 호사가 아니라, 치밀한 운영과 꾸준한 공부, 그리고 균형 감각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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