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 집단은 곧 강력한 정치 기반을 이루었고 후대에 ‘훈구파’라 불렸다. 한명회·정인지·신숙주 등이 그 핵심이었다. 그들은 반정의 공을 바탕으로 관직과 토지, 혼인 네트워크를 독점하며 기득권을 공고히 했고, 동시에 국정 전반을 제도화하는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다. 법전 편찬은 세조 대에 본격화되어 이후 예종·성종 대에 걸쳐 완결된 《경국대전》으로 결실을 보았고, 국가 통사 편찬의 흐름 또한 성종 대 《동국통감》으로 이어졌다. 즉, 훈구파는 권세를 누렸을 뿐 아니라 국가 운영의 ‘틀’을 만드는 작업에도 참여해 양면의 유산을 남긴 셈이다. 이 가운데 한명회는 세조의 책략가이자 정국 설계자로서 장수를 누렸고, 말년에 한강 변에 갈매기와 벗하며 조용히 살고자 세운 정자를 ‘압구정(狎鷗亭)’이라 이름 지었다. 오늘날 지명으로 남은 그 이름은 한 세대의 권력 기억을 환기한다.
세조는 먼저 권력의 흐름을 국왕에게 곧바로 모이게 하려 했다. 그는 의정부서사제를 사실상 정지시키고 육조직계제를 부활시켜, 형벌 삼복 등 일부 중대 사안만 의정부가 거들 수 있게 했다. 이로써 국정의 실무 지휘선은 왕-육조-품계 관원으로 직결되었다. 또한 세종대의 연구·자문 기구였던 집현전이 언관·대간의 견제와 맞물려 군주권을 입력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아 폐지했다. 대신 제도 개정과 문물 정비는 전례서·교지·등록의 체계를 촘촘히 하여 추진했고, 왕명으로 설치한 임시 기구와 대신 합좌 체제를 통해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언론 기능의 약화는 부작용도 낳았다. 사헌부·사간원의 간쟁이 예민한 국면에서 잦은 금고·파면으로 이어지며, 비판의 통로가 좁아진 것이다. 세조는 결단이 빠르고 상벌이 명료했지만, 간혹 감정에 기운 처분으로 비쳐 원성을 샀다. 그럼에도 그는 현실 행정의 정합성을 중시하여 군역·호적·창고·문서 체계를 같은 호흡으로 손질했고, 왕권·관권의 접점을 규격화하려 했다.
불교 진흥은 세조 통치의 독특한 표지다. 유교적 예치가 국가 이념인 질서 속에서도 그는 불교의 자선·교육·의료 기능을 재평가했다. 왕명으로 간경도감이 설치되어 한글로 불경을 번역·간행했고, 세종대 창제된 새 문자 사용을 적극 확장했다. 《월인석보》의 편찬과 보급은 문자·종교·출판의 접점을 형성해 평민층의 문식성 확장에 기여했다. 원각사의 창건 역시 이 맥락에 놓인다. 오늘날 탑골공원에 남아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대리석 재질과 정교한 조각으로 유명한데, 국보 제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유교 국정의 틀 안에서 불교가 공공선을 보완하는 장치로 활용된 셈이며, 세조 개인의 신앙적 성향과도 맞물려 독자적 문물 경관을 남겼다.
세조는 학문과 기술에도 관심이 깊었다. 악서의 정리, 의서 간행, 역법·음률의 점검에 뜻을 보였고, 군사 제도의 재편도 서둘렀다. 그는 지방 방어를 기초 단위로 묶는 진관 체제를 정비하고, 오위 체제 운용을 현실화하여 요충지에 화포·화차를 배치했다. 변방의 성책과 창고의 비축량을 주기적으로 조사하게 하여 수성(守城)과 기동(機動)의 균형을 추구했고, 그 과정에서 군기시·병조의 장부를 표준화했다. 농정에서는 수리 시설 보수와 종자 보급, 부세에서는 토지·수조권 제도의 병폐를 손보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1466년 시행된 직전법은 과전법의 누적된 모순-세습·잠식·분급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권을 부여하고, 관료 퇴직 시 환수하는 원리를 확립했다. 이는 국가가 토지에서 발생하는 조세 권리를 다시 회수·재분배하는 통로를 열어 관료제 유지 비용을 안정화한 조치였다. 물론 사후에는 관리들의 수납 과다·민전 잠식 등 새로운 문제가 따라 붙었으나, 제도사적으로는 분배 원리의 재설계를 시도한 사례로 의미가 크다.
세조 집권기의 가장 큰 내란은 1467년 함길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었다. 중앙의 통제 강화와 관찰사·병마절도사 인사에 반발한 지역 무장·향리 연합이 봉기하자, 조정은 신속하게 토벌군을 편성해 진압했다. 이 사건은 북방 방어선의 취약 지점을 드러냈고, 이후 조정은 요충에 성책을 추가하고 군수 보급로를 손보며, 관찰사 권한과 병력 지휘선의 중복을 정리했다. 반란의 ‘소문전술’이 권력 핵심을 흔들 뻔한 경험은 정보 보고 체계를 고도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앙집권의 논리를 한층 강화했다.
세조 개인의 이력도 흥미롭다. 본래 호칭은 진양대군이었으나, 세종이 수양대군으로 고쳐 부르게 한 일화가 전한다.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절의의 상징-백이·숙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붙여, 훗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도를 지키라는 경계의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의 능력을 아끼면서도 기개가 과하여 큰 변고를 부를까 염려했는데, 역사는 그 우려의 반대편에서 굴러갔다. 그럼에도 세조는 자신에게 불리한 명분의 결핍을 ‘작동하는 국가’로 보완하려 했다. 법전을 정비하고, 군정을 현실화하고, 문서와 공문을 표준어식으로 정리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훈구파의 공·과는 분명했다. 반정의 주역이었던 그들은 국방·재정·법제 정비에 실무로 참여하며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세가(勢家)의 토지 축적과 사사로운 경제 네트워크로 백성의 원성을 샀다. 이익의 사유화와 공공의 제도화가 동시에 진행된 아이러니가 바로 세조 대 정치의 얼굴이었다. 세조 말년에는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원상제가 시행되었다. 이는 국왕이 병약하거나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재상들이 승정원에 모여 국정을 합의로 처리하는 비상 통치 장치였다. 세조는 이 제도를 띄워 놓은 뒤 1468년 쉰두 살로 세상을 떠났다. 단단한 결단력과 빠른 집행으로 ‘작동성’을 내세운 군주였으나, 언론 기능의 축소와 견제 약화, 측근 의존은 후대의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세조 대의 여러 제도는 이후 조선의 표준이 된다. 왕도 정치의 규격을 법전에 묶어 다음 왕대가 손보기 쉽게 만든 일, 군역·호적·장부·창고를 하나의 회계·행정 언어로 연결한 일, 새 문자의 실용을 확대해 종교·교학·출판을 돌게 한 일은 공으로 평가할 대목이다. 동시에, 권력의 취득 과정이 남긴 상흔—언론의 위축, 반대파의 숙청, 지역 불만의 폭발—은 제도적 안전장치의 필요를 각인시켰다. 훈구파가 세운 틀은 성종 대 사림의 유입과 더불어 수정·보완을 거치며 장기 지속 가능한 규범으로 다듬어졌고, 조선 전기의 정치는 그 긴장과 조정의 궤적 위에서 움직였다. 결국 세조는 명분의 빈틈을 실용과 제도화로 메우려 한 실력형 군주였고, 훈구파는 그 실행의 팔이자 때로는 과도한 사익을 좇은 그림자였다. 이 두 축이 남긴 공과 과의 교차가 곧 세조 대의 진짜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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