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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흐름

조선왕조,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

by 열매와 꿈나무 2025.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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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뒤를 이은 이는 셋째 아들 충녕이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토론을 즐기던 그는 밤을 새우며 경전을 파고들었고, 태종이 “밤에는 불을 끄고 쉬라”고 타이를 만큼 학구적이었다. 반면 장자 양녕은 세자로 책봉된 뒤에도 기질이 거칠고 공부에 성실하지 못해 신하들의 신망을 잃었다. 경회루 연회에서 충녕이 유교 경전을 막힘없이 읊자 태종이 감탄했고, 곁에 있던 양녕에게 “어찌 학문이 이만 못하냐”라며 핀잔을 주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결국 양녕은 사사로운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1418년 폐세자가 되었고, 충녕 이도가 새로 세자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태종은 상왕을 자처하며 스스로 물러났고, 스물두 살의 충녕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으로 즉위했다. 태종이 다져 놓은 권력 기반이 있었기에 세종은 초반부터 제도와 문화를 폭넓게 손볼 수 있었다.

세종은 인재를 모으는 일로 국정의 방향을 잡았다.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해 젊고 총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고, 그곳을 학문 연구소이자 정책 싱크탱크로 운영했다. 동시에 의정부서사제를 정비해 재상들이 정무를 합의로 처리하게 하되, 군사·형벌·인사 같은 대사는 국왕이 직접 결재하도록 하여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잡았다. 경연을 상설화해 임금과 신하가 경서와 역사서를 두고 날마다 토론하도록 만든 것도 세종의 특징이다. 질문하고 반박하며 결론을 찾는 이 문화는 조선 초기 정치의 품격을 높였다. 음악 제도 역시 손봤다. 박연 등 악학의 대가들을 기용해 의례 음악을 정비하고, 음의 길이와 박을 격자로 기록하는 정간보를 마련해 궁중 음악의 표준을 세웠다.

과학기술의 도약은 세종대의 또 다른 얼굴이다. 조선의 하늘을 조선의 계산으로 읽기 위해 역법을 재구성했고, 그 결실이 ‘칠정산’이었다. 태양년의 길이를 365일 5시간 48분 45초로 산출해 오늘날 값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의 정밀도를 보여 주었다. 장영실을 비롯한 기술자들이 제작한 자동 물시계 자격루는 일정한 시각마다 종과 징을 스스로 울려 시간을 알렸고, 해시계와 별 관측 기구도 개선되어 농사·군사·의례의 일정을 정확히 맞추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농업에서는 지역별 토질과 기후에 맞춘 방법을 체계화한 ‘농사직설’을 편찬해 백성들이 당장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지식이 책 속에만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내려오게 한 것이다.

세종의 개혁은 조세 제도에서도 빛났다. 토지의 비옥도를 기준으로 세율을 나눈 전분 6등법과, 해마다 풍년과 흉년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는 연분 9 등법을 도입했다. 이 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각 도의 의견을 수합하고 시험 적용을 거치는 등 넓은 공론을 모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대신들끼리만 결론을 내리지 않고 백성의 현실을 반영하려 한 노력 덕분에 세금의 형평성이 높아지고, 과도한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임금도 사람인지라 과로와 야근, 잦은 독서로 눈병이 악화되어 1442년부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게 된다. 그럼에도 세종은 백성이 스스로 뜻을 적고 생각을 나눌 수단을 마련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1443년, 자음 17자와 모음 11자로 이루어진 새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가 그것이다. 발성 기관의 모양을 본떠 기본 자음을 만들고, 하늘·땅·사람의 이치를 본뜬 점과 선으로 모음을 구성했으며, 획을 더해 소리를 세분하는 체계적 설계를 갖추었다. 한문 위주의 기록 문화 속에서 배움의 길이 막혀 있던 평민도 짧은 시간에 글을 익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해례를 통해 원리와 쓰임을 자세히 남겨 후세가 그 뜻을 오해 없이 이어받도록 했다.

대외관계에서는 강대국과의 긴장을 관리하는 현실 감각을 보였다. 명과의 사대는 굴복이 아니라 국경의 평온과 교역의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 과정에서 공녀 선발 같은 가혹한 요구가 되풀이되며 많은 비극이 생겨났고, 한 집안의 자매가 서로 다른 시기에 북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세종은 군사력 정비와 외교 교섭을 병행해 전면전을 피하려 했고, 다수의 생명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약소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최악을 피하는 선택을 이어 간 셈이다.

세종 개인의 면모도 흥미롭다. 그는 무예보다 독서와 토론을 즐겼고, 체구가 건장했으며 육류를 좋아했다. 부친 태종의 상을 당했을 때 예에 따라 금육을 지켜야 했으나, 건강을 염려한 태종이 생전에 “몸을 해치지 말라”라고 당부한 말이 전한다. 세종은 예를 중시하되 몸을 망칠 정도의 금욕은 경계했고, 학문과 실용, 예와 생계 사이의 현실적 균형을 추구했다. 긴 재위 기간 동안 세자의 수업도 자연히 길어져, 아들 이향은 수십 년간 국정을 곁에서 배우며 내공을 쌓았다. 훗날 문종으로 즉위한 뒤 비록 재위는 짧았으나 제도와 인사를 정돈하는 능숙함을 보일 수 있었던 배경이다.

돌이켜보면 세종의 시대는 한 천재의 번뜩임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을 알아보고 맡길 자리에 앉히며, 지식을 백성의 언어로 번역해 삶에 스며들게 하고, 힘이 부족한 곳은 제도로 보완한 결과였다. 토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록과 측정을 생활화하며, 모두가 쉽게 배우는 도구를 마련하는 것—이것이 세종이 남긴 운영의 원리였다. 그래서 그의 업적은 거대한 기념비 한 기가 아니라 매일의 생활을 조금씩 낫게 만드는 촘촘한 설계도에 가깝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메시지는 분명하다. 의견이 다르면 더 깊이 토론하고, 현실을 정확히 재고, 배움의 문턱을 낮추며,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을 때는 지혜로 빈틈을 메우라는 것. 세종이 보여 준 그 길 위에서 조선은 학문과 기술, 음악과 농업, 법과 행정의 토대를 단단히 세웠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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