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국사의 흐름17 예송논쟁 효종은 1649년 인조가 붕어하자 봉림대군의 신분으로 즉위해 조선의 제17대 임금이 되었다. 원래 왕위는 장자인 소현세자의 몫이었으나, 세자가 청에서 돌아온 뒤 급서하면서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효종의 효심을 여러 차례 전한다. 사소한 과일과 채소처럼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반드시 먼저 부왕께 올린 뒤에야 입에 댔다고 하고, 대대로 남은 가문 간의 반목 기록을 볼 때면 책을 덮고 탄식했다고 적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그는 강화에서 단식에 가까운 마음고생을 했고, 이어 소현세자와 더불어 청의 선양으로 볼모로 끌려갔을 때 형을 지극히 돌보았다. 귀국길에 청이 내민 후한 선물을 사양하고 그 대신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돌려 달라 청해 감탄을 샀다.. 2025. 9. 12. 조선에서 대한제국이 되다(2)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인조반정과 외교 정책 변화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서인 세력이 주도한 이 정변은 조선의 외교 정책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금(後金)이 부상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의 친명 정책은 현실과 맞지 않는 선택이었다.이괄의 난과 국방력 약화인조 즉위 초인 1624년, 이괄의 난이 발생했다.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2등 공신에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괄은 군대를 이끌고 한양을 점령하며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다.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피난했고, 결국 이괄의 부하들이 그를 죽이면서 반란이 진압되었.. 2025. 9. 1. 조선에서 대한제국이 되다(1) 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역사적 전개광해군의 즉위와 정치적 배경광해군은 선조의 서자로 태어나 복잡한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쳐 1608년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 과정은 조선 왕실 내부의 권력 갈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선조는 적자인 영창대군을 선호했으나, 광해군이 임진왜란 중 분조를 운영하며 보인 능력과 대신들의 지지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된 상태였으며, 동아시아 정세 또한 급변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만주 지역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광해군의 주요 정책과 업적광해군은 전후 복구와 국정 안정화에 주력했다.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대동법의 시범 시행이었.. 2025. 8. 31. 조선왕조, 임진왜란(2) 1. 사림에서 갈라진 동인과 서인의 대립 선조가 즉위한 1567년은 조선 정치의 무게중심이 본격적으로 사림에게로 옮겨간 분기점이었다. 사화 네 차례를 거치며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학맥과 도덕 명분을 축적한 사림은 마침내 조정의 주력으로 등장했다. 선조는 즉위 초 훈구의 잔영을 걷어내고 성리학적 규범에 충실한 인재들을 대거 기용했으나, 같은 사림 내부에서도 국정 운영의 방식과 인사 원칙을 두고 견해차가 깊어졌다. 그 균열은 곧 붕당의 형성으로 굳어졌다.결정적 계기는 이조전랑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이조전랑은 삼사의 인사 추천을 좌우할 수 있는 관직이라 비록 품계는 높지 않아도 정치적 파급력이 컸다. 이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맞섰고, 결과적으로 김효원이 차지했다. 이어 후임으.. 2025. 8. 25. 조선왕조, 임진왜란(1) 총명하고 자애로운 인종의 즉위 인종은 조선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겼다. 여섯 살에 책봉된 뒤로 장장 스물네 해 동안 세자 교육을 받았지만, 임금으로 보낸 시간은 여덟 달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당대 사류가 인종을 성군의 자질을 갖춘 군주로 추숭한 까닭은 분명했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해 경서를 탐독했고, 말과 행동이 공손했으며, 효심이 지극했다. 문제는 그 효심이 몸을 해칠 만큼 깊었다는 데 있었다.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여러 날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통곡했고,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은 창덕궁과 경복궁의 처처를 돌며 “이곳에 앉으셨고 저곳에 기대셨다”라며 선왕의 흔적을 더듬다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굶주림과 슬픔이 겹쳐 몸은 급속히 쇠약해졌고, 대신들은 그에게 밥 한.. 2025. 8. 22. 조선왕조, 연산군(2) 1) 결국 미쳐버린 연산군의 최후무오·갑자 두 번의 사화로 조정의 기둥 같은 인물들이 대거 쓰러지자, 바른말을 올리는 벼슬아치는 드물어졌다. 그 와중에도 끝내 직언을 멈추지 않은 인물이 김처선이었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연회 자리에서 김처선이 “늙은 신하가 여러 임금을 모셨으나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따끔히 아뢰었다. 격분한 연산군이 활을 들어 그의 옆구리에 화살을 쏘았는데, 김처선은 쓰러진 채로도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전하께서 오래 보위에 계시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라 했다. 왕은 그의 다리를 자르게 하고 “일어나 걸어 보라”고 조롱했으나, 김처선은 “상감도 다리가 잘리면 걸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끝까지 군주의 자제를 당부했다는.. 2025. 8. 21. 이전 1 2 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