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국사의 흐름17 조선왕조, 연산군 무오사화: 사초에서 피어난 첫 번째 화(禍)1498년, 연산군 즉위 초기의 팽팽한 긴장 위로 사림(士林)과 훈구(勳舊)의 오래된 균열이 터졌다. 발단은 사초였다. 실록 편찬의 재료가 되는 사초 가운데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로 지목되었다. 글은 중국 항우와 의제의 고사를 빌려 세조의 계유정난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의 글이 제자들의 손을 거쳐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 반영되었다는 점이 빌미가 되었다. 훈구 측은 이를 “왕실 정통을 훼손하는 문장”으로 규정했고, 연산군은 즉각 강경 기조로 돌아섰다. 김일손 등 제자·관련 관원들이 차례로 국문을 당했으며, 당사자인 김종직에게는 사후의 극형인 부관참시가 내려졌다. 첫 사화로 사림은 크게 꺾였고, 연산군은 왕권의 직접적.. 2025. 8. 20. 조선왕조, 폐비 윤씨 피바람을 부른 폐비 윤 씨의 죽음 성종 즉위 초, 한 궁인이 몇 해 뒤 중궁에 오르게 된다. 훗날 ‘폐비 윤 씨’로 불리는 그 사람이다. 궁중 평판은 검소하고 행실이 단정하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왕실이 손꼽아 기다리던 첫 아들을 잉태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왕실에서 장손의 의미는 지극히 컸다. 왕통의 안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윤 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일시적으로 내명부의 기강은 정돈되는 듯 보였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세자 책봉의 길을 열었고, 궁안팎에서는 “중궁의 덕이 드러났다”는 칭찬도 뒤따랐다. 하지만 출산 뒤 곧바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성종은 젊은 임금이었다. 유교 정치에 몰두하며 낮에는 정사를, 밤에는 경연과 독서로 시간을 보냈고, 후궁들이 있는 내전에도 들락날락했다. 산후의.. 2025. 8. 19. 조선왕조, 태평성대 성종 성종의 즉위는 준비된 계승이 아니라 급전의 결과였다. 겨우 열세 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세자 수업을 밟을 여유도, 아버지 임금의 그늘에서 국정을 배울 시간도 없었다. 적장자도 아니었다. 형 월산대군과 사촌 제안대군을 제치고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니 스스로 통치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다행히 곁에는 노련한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있었다.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초기 국정을 안정시키고, 원상제를 가동해 원로 대신들의 합좌 체계를 굴려 어린 군주가 국정 리듬을 익히게 했다. 이 과도기 장치는 예종 대보다 한층 촘촘히 작동했고, 성종은 그 틀 안에서 빠르게 배우며 성장했다. 성종이 택한 학습법의 중심은 경연이었다. 그는 낮의 정규 강론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밤에도 신하를 불러 보충 토의를 열었는데, 이를 야대라 .. 2025. 8. 18. 조선왕조, 조선의 발전을 이룬 예종 1468년,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이 왕위를 이었고 역사에서는 8대 임금 예종으로 기록된다. “왜 장자가 아닌 차자가 즉위했는가”라는 물음은 의경세자의 요절에서 출발한다. 세조의 적장자였던 의경세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어 정식으로 세자 교육을 받았으나 원인 불명의 병세로 스무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자을 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후일 자을 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고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한다. 종법의 원칙대로라면 장손인 월산대군이 종계를 잇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당시의 시점에서 월산대군은 아직 나이가 어렸고 국정의 중추를 맡기기에는 경험과 기반이 부족했다. 세조는 국가의 연속성과 안정을 우선시하여 성인이며 군사와 예악, 문무에 두루 익숙한 차남 해양대군을 세자.. 2025. 8. 17. 조선왕조, 패륜의 세조 그 업적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 집단은 곧 강력한 정치 기반을 이루었고 후대에 ‘훈구파’라 불렸다. 한명회·정인지·신숙주 등이 그 핵심이었다. 그들은 반정의 공을 바탕으로 관직과 토지, 혼인 네트워크를 독점하며 기득권을 공고히 했고, 동시에 국정 전반을 제도화하는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다. 법전 편찬은 세조 대에 본격화되어 이후 예종·성종 대에 걸쳐 완결된 《경국대전》으로 결실을 보았고, 국가 통사 편찬의 흐름 또한 성종 대 《동국통감》으로 이어졌다. 즉, 훈구파는 권세를 누렸을 뿐 아니라 국가 운영의 ‘틀’을 만드는 작업에도 참여해 양면의 유산을 남긴 셈이다. 이 가운데 한명회는 세조의 책략가이자 정국 설계자로서 장수를 누렸고, 말년에 한강 변에 갈매기와 벗하며 조용히 살고자 세운 정자를 ‘압구정(狎鷗亭)’이라.. 2025. 8. 16. 조선왕조, 꺾여버린 어린 군주 1. 꺾여버린 어린 군주 1452년 열두 살의 단종이 즉위했을 때 조정에는 그를 보호할 대왕대비도, 국정을 임시로 맡을 왕비도 없었다. 어머니를 잃고 곧 아버지마저 떠나보낸 소년 왕 곁에는 유언으로 지명된 고명대신들만 남았다.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는 인사 문서를 정리해 올리고, 세자가 붓끝으로 낙점하는 형식의 정사를 진행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황표 정사’라 불렀다. 자연스레 권력이 두 정승에게 쏠리자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칼끝을 갈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가로막힌 거목은 4군 6진 개척을 지휘하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을 주도한 원로 김종서였다.1453년 가을밤, 수양대군은 측근과 병력을 이끌고 김종서의 집 문 앞에서 말고삐를 잡았다. 인사를 나오던 김종서가 봉문을 열려는 찰나.. 2025. 8. 14. 이전 1 2 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