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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임진왜란(3) 조선은 1392년 개국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대체로 평온했다. 반면 바다 건너 일본은 다이묘가 각지에서 전쟁을 벌이는 전국시대가 한 세기를 넘기며 이어졌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에 올라 정국을 틀어쥐고, 1590년 오다·도쿠가와와의 연쇄 연합과 압박 끝에 사실상 전국 통일을 마무리한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자 그는 대륙 원정의 야망을 드러냈다. 일본 내부에는 무리한 정벌이라는 이견도 있었으나, 도요토미는 조선을 관문으로 삼아 명을 치겠다는 목표를 굽히지 않았다. 대마도를 경유해 정보망을 가동하고, 조선 연안과 내륙의 길을 탐문해 지도를 확보했으며, 각 번에 병력을 할당해 진군선을 정비했다. 조선도 이상 기류를 감지했다. 대마도주를 통해 전해진 도요토미의 요구는 “명정벌에 길을 열라”는 것이었.. 2025. 8. 26.
조선왕조, 임진왜란(2) 1. 사림에서 갈라진 동인과 서인의 대립 선조가 즉위한 1567년은 조선 정치의 무게중심이 본격적으로 사림에게로 옮겨간 분기점이었다. 사화 네 차례를 거치며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학맥과 도덕 명분을 축적한 사림은 마침내 조정의 주력으로 등장했다. 선조는 즉위 초 훈구의 잔영을 걷어내고 성리학적 규범에 충실한 인재들을 대거 기용했으나, 같은 사림 내부에서도 국정 운영의 방식과 인사 원칙을 두고 견해차가 깊어졌다. 그 균열은 곧 붕당의 형성으로 굳어졌다.결정적 계기는 이조전랑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이조전랑은 삼사의 인사 추천을 좌우할 수 있는 관직이라 비록 품계는 높지 않아도 정치적 파급력이 컸다. 이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맞섰고, 결과적으로 김효원이 차지했다. 이어 후임으.. 2025. 8. 25.
조선왕조, 임진왜란(1) 총명하고 자애로운 인종의 즉위 인종은 조선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겼다. 여섯 살에 책봉된 뒤로 장장 스물네 해 동안 세자 교육을 받았지만, 임금으로 보낸 시간은 여덟 달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당대 사류가 인종을 성군의 자질을 갖춘 군주로 추숭한 까닭은 분명했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해 경서를 탐독했고, 말과 행동이 공손했으며, 효심이 지극했다. 문제는 그 효심이 몸을 해칠 만큼 깊었다는 데 있었다.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여러 날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통곡했고,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은 창덕궁과 경복궁의 처처를 돌며 “이곳에 앉으셨고 저곳에 기대셨다”라며 선왕의 흔적을 더듬다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굶주림과 슬픔이 겹쳐 몸은 급속히 쇠약해졌고, 대신들은 그에게 밥 한.. 2025. 8. 22.
조선왕조, 연산군(2) 1) 결국 미쳐버린 연산군의 최후무오·갑자 두 번의 사화로 조정의 기둥 같은 인물들이 대거 쓰러지자, 바른말을 올리는 벼슬아치는 드물어졌다. 그 와중에도 끝내 직언을 멈추지 않은 인물이 김처선이었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연회 자리에서 김처선이 “늙은 신하가 여러 임금을 모셨으나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따끔히 아뢰었다. 격분한 연산군이 활을 들어 그의 옆구리에 화살을 쏘았는데, 김처선은 쓰러진 채로도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전하께서 오래 보위에 계시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라 했다. 왕은 그의 다리를 자르게 하고 “일어나 걸어 보라”고 조롱했으나, 김처선은 “상감도 다리가 잘리면 걸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끝까지 군주의 자제를 당부했다는.. 2025. 8. 21.
조선왕조, 연산군 무오사화: 사초에서 피어난 첫 번째 화(禍)1498년, 연산군 즉위 초기의 팽팽한 긴장 위로 사림(士林)과 훈구(勳舊)의 오래된 균열이 터졌다. 발단은 사초였다. 실록 편찬의 재료가 되는 사초 가운데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로 지목되었다. 글은 중국 항우와 의제의 고사를 빌려 세조의 계유정난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의 글이 제자들의 손을 거쳐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 반영되었다는 점이 빌미가 되었다. 훈구 측은 이를 “왕실 정통을 훼손하는 문장”으로 규정했고, 연산군은 즉각 강경 기조로 돌아섰다. 김일손 등 제자·관련 관원들이 차례로 국문을 당했으며, 당사자인 김종직에게는 사후의 극형인 부관참시가 내려졌다. 첫 사화로 사림은 크게 꺾였고, 연산군은 왕권의 직접적.. 2025. 8. 20.
조선왕조, 폐비 윤씨 피바람을 부른 폐비 윤 씨의 죽음 성종 즉위 초, 한 궁인이 몇 해 뒤 중궁에 오르게 된다. 훗날 ‘폐비 윤 씨’로 불리는 그 사람이다. 궁중 평판은 검소하고 행실이 단정하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왕실이 손꼽아 기다리던 첫 아들을 잉태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왕실에서 장손의 의미는 지극히 컸다. 왕통의 안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윤 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일시적으로 내명부의 기강은 정돈되는 듯 보였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세자 책봉의 길을 열었고, 궁안팎에서는 “중궁의 덕이 드러났다”는 칭찬도 뒤따랐다. 하지만 출산 뒤 곧바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성종은 젊은 임금이었다. 유교 정치에 몰두하며 낮에는 정사를, 밤에는 경연과 독서로 시간을 보냈고, 후궁들이 있는 내전에도 들락날락했다. 산후의.. 2025.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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