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국 미쳐버린 연산군의 최후
무오·갑자 두 번의 사화로 조정의 기둥 같은 인물들이 대거 쓰러지자, 바른말을 올리는 벼슬아치는 드물어졌다. 그 와중에도 끝내 직언을 멈추지 않은 인물이 김처선이었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연회 자리에서 김처선이 “늙은 신하가 여러 임금을 모셨으나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따끔히 아뢰었다. 격분한 연산군이 활을 들어 그의 옆구리에 화살을 쏘았는데, 김처선은 쓰러진 채로도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전하께서 오래 보위에 계시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라 했다. 왕은 그의 다리를 자르게 하고 “일어나 걸어 보라”고 조롱했으나, 김처선은 “상감도 다리가 잘리면 걸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끝까지 군주의 자제를 당부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모진 형벌 끝에 죽임을 당했고, 집과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친족까지 화를 입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의 세목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으나, 말로 왕을 막은 자의 최후가 참혹했다는 점은 시대의 공통된 기억으로 남았다.
《연산군일기》에는 군주의 불안정한 심리를 짐작케 하는 대목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아무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한밤중에 괴성을 지르며 후원을 달려 나갔다고 적는다. 무당 굿을 무척 좋아해 스스로 옷차림을 꾸미고 폐비 윤 씨가 빙의한 모습을 흉내 냈다는 기록도 있다. 실록은 이를 “광질”이라 적시했다. 슬픔과 분노, 고립과 의심이 겹치며 왕의 내면은 서서히 금이 갔다. 언론 삼사가 위축되고 간언의 통로가 닫히자 그 금은 더 넓어졌다. 잘못을 고치게 하는 말이 사라진 자리에는 과시와 폭력이 들어왔다.
결국 1506년, 반정 세력이 거사를 일으켰다. 조정 안팎의 원로와 무장이 뜻을 모아 궁문을 장악했고, 연산군은 폐위되었다. 그는 강화도로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 군주가 감정과 권력을 구분하지 못하고, 제도가 그 감정을 완충하지 못할 때 국가가 얼마나 빠르게 기울어지는가—연산군의 최후는 그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2) 개혁을 꿈꾼 조광조와 기묘사화
연산군의 이복형인 진성대군은 반정 세력의 추대로 19세에 즉위하여 11대 임금 중종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왕좌는 공신들의 어깨 위에 올려진 것이었기에 출발부터 취약했다. 즉위 직후부터 반정 공신의 압박은 거셌고, 마침내 단경왕후 신 씨를 폐위하라는 요구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장인 신수근이 반정을 반대하다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민간에는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 전해진다. 중종이 옛 왕비를 그리워해 높은 곳에서 그녀의 집 쪽을 바라보곤 하자, 신 씨가 분홍치마를 바위 위에 펼쳐 보였다는 이야기다. 전승은 애절하되, 정치는 냉혹했다. 뒤이어 책봉된 장경왕후 윤 씨는 세자이호(훗날 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스물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국정의 빈틈은 컸고, 반정 공신의 그늘은 짙었다.
중종은 무너진 기강을 세우려 경연을 열고, 홍문관의 기능을 되살려 군주의 문답과 정책 토론을 일상화했다. 그러나 공신 세력의 전횡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균형을 찾기 위해 중종은 새로운 세력—사림—을 불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정점에 조광조가 있었다. 과거 급제로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청렴과 급진적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먼저 도교적 색채가 짙은 소격서를 혁파하자고 주장했다. “국가의 재난을 굿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논리였다. 임금은 처음엔 머뭇거렸으나, 조광조의 끈질긴 상소와 논변에 밀려 소격서를 폐지했다. 이어 그는 인재 등용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현량과를 실시하자고 건의했다. 덕성과 학문을 겸비한 자를 천거받아 뽑는 제도였고, 실제로 시행되자 사림이 대거 조정에 진출했다. 삼사의 언론은 다시 예리해졌고, 공론장은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개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광조와 사림은 반정 이후 책봉된 공신의 공훈을 재심하자고 요구했다. 빈약한 공으로 거대한 토지와 노비를 받은 자들의 ‘위훈’을 삭제하자는, 나라 살림과 도덕 정치를 동시에 겨냥한 주장이었다. 중종은 난감했다. 그를 보좌해 왕위에 올린 이들이 바로 그 공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을 끌었지만, 조광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1519년, 중종은 정국공신을 개정하라는 교지를 내렸다가, 불과 열흘 만에 취소했다. 권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이미 내려진 상을 뒤집는 부담도 컸다. 판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왕은 훈구의 손을 다시 붙잡았고, 조광조와 사림을 겨냥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세 번째 사화, 기묘사화다.
기묘사화는 연산군 대 사화와 결이 달랐다. 전자가 왕의 분노와 보복이 전면에 섰다면, 후자는 왕이 균형의 추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자, 공신의 힘을 빌려 개혁의 선봉을 쳐낸 사건이었다.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사되었고, 동지들은 파직·유배로 흩어졌다. 공론장은 다시 얼어붙었다. 다만 사림의 씨앗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서원과 향교, 서당을 중심으로 학맥은 이어졌고, 훗날 성리학적 공론의 주류로 성장한다.
정치는 흔들렸고, 변방은 어지러웠다. 남쪽에서는 대마도 세력의 지원을 받은 왜구가 삼포왜란을 일으켜 해안선을 위협했고, 북쪽에서는 여진의 침입이 잦았다. 조정은 비상 대응 기구로 비변사를 두어 전란의 대응을 논의했는데, 처음에는 임시로 운영되다가 이후 왜변과 외환을 겪으며 점차 상설화된다. 국방·외교·치안이 하나의 회의 테이블로 모이면서, 조선의 위기 관리 방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1544년, 쉰일곱의 나이로 중종은 눈을 감았다. 그의 재위는 반정의 그늘과 개혁의 열망, 그리고 균형 감각의 진자 운동이 교차한 시간이었다. 왕은 공신의 그늘을 의식하며 사림을 불러 균형을 꾀했으나, 다시 공신의 손을 잡고 사림을 누르며 권력을 조정했다. 그 과정에서 나라의 제도는 한층 복잡해졌고, 공론장은 때로 뜨겁게 달아오르다 차갑게 굳었다.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진자 운동 사이에서 조선은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감정은 제도로 제어되어야 하며, 명분은 실용과 손을 맞잡을 때 오래간다. 사화의 시대는 비극의 연쇄였지만, 동시에 제도와 공론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를 두고 오늘까지 유효한 질문을 남겼다.
'한국사의 흐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임진왜란(2) (4) | 2025.08.25 |
---|---|
조선왕조, 임진왜란(1) (1) | 2025.08.22 |
조선왕조, 연산군 (5) | 2025.08.20 |
조선왕조, 폐비 윤씨 (3) | 2025.08.19 |
조선왕조, 태평성대 성종 (12) | 2025.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