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의 흐름

조선왕조, 임진왜란(1)

by 커다란 꿈나무 2025. 8. 22.
반응형

 

  1. 총명하고 자애로운 인종의 즉위

 인종은 조선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겼다. 여섯 살에 책봉된 뒤로 장장 스물네 해 동안 세자 교육을 받았지만, 임금으로 보낸 시간은 여덟 달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당대 사류가 인종을 성군의 자질을 갖춘 군주로 추숭한 까닭은 분명했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해 경서를 탐독했고, 말과 행동이 공손했으며, 효심이 지극했다. 문제는 그 효심이 몸을 해칠 만큼 깊었다는 데 있었다.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여러 날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통곡했고,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은 창덕궁과 경복궁의 처처를 돌며 “이곳에 앉으셨고 저곳에 기대셨다”라며 선왕의 흔적을 더듬다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굶주림과 슬픔이 겹쳐 몸은 급속히 쇠약해졌고, 대신들은 그에게 밥 한 숟갈이라도 뜨게 하려고 기력을 돋우는 반찬을 아뢰었다.

 인종의 삶에는 상실이 많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장경왕후를 그리워했고, 우애 깊던 누이 효혜공주를 잃었을 때는 병이 날 정도로 슬퍼했다. 계모 문정왕후에게도 예를 다했지만 마음을 얻기는 어려웠다. 문정왕후는 친아들 경원대군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고, 궁정의 냉기는 세자에게 외로운 그림자로 드리웠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세자를 해치려 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어느 밤 동궁에서 잠들어 있던 세자가 뜨거운 열기에 깨어 보니 주변이 불길에 휩싸였고, 세자는 빈궁을 먼저 피하게 한 뒤 스스로는 자리에 앉아 죽음을 맞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다. 또 독이 든 떡을 권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물론 이런 전승은 후대의 각색이 섞였을 수 있으나, 당시 세자가 느꼈을 압박과 긴장을 짐작하게 한다.

 짧은 재위 탓에 큰 사업을 펼칠 겨를은 없었으나, 인종은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의 한을 풀어 주려 힘썼다. 조광조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인물들의 명예를 바로잡고, 덕성과 학문을 갖춘 인재를 뽑는 현량과의 취지를 되살렸다. 그러나 건강은 급격히 기울었다. 실록에는 혀가 굳어 말을 잇지 못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는 기록이 보인다. 서른을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한 채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이복동생이 왕위를 이었다. 역사는 그를 성군이 될 씨앗을 품고도 피어나지 못한 군주로 기억한다.

  1. 여인천하 시대를 연 수렴청정의 시작

 1545년, 문정왕후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친아들 경원대군이 열두 살의 나이로 즉위해 13대 임금 명종이 되었다. 어린 군주를 대신해 문정왕후가 8년간 수렴청정을 펼치며 국정을 주재했다. 바로 그 해, 네 번째 사화가 터졌다. 을사사화다. 인종의 외가를 중심으로 한 대윤과 문정왕후 측 소윤이 맞부딪힌 결과였다. 여기서 대윤은 장경왕후의 오라버니 윤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소윤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축으로 한 세력을 가리킨다. 인종 재위 때는 대윤이 우세했으나 인종이 붕어하자 정국은 급전했고, 명종 즉위와 함께 소윤이 주도권을 잡았다. 윤원형은 누나 문정왕후의 권세를 업고 대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사림 다수가 이 외척 싸움의 회오리에 휩쓸려 희생되었고, 조정은 한동안 공론의 숨통이 막혔다.

을사사화의 상흔은 오래갔다. 이듬해 양재역 부근에 붉은 글씨로 쓰인 벽서가 붙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서 권세를 농간하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앉아서 보게 되었다”는 날선 문구였다. 명백히 문정왕후를 겨눈 글이었다. 분노한 궁정은 잔여 대윤 세력과 연루자를 색출했고, 탄압의 불길은 더 번졌다. 후대에는 이를 벽서 사건의 간지에 따라 정미사화라고도 불렀다. 이렇게 소윤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자 간신과 변고가 잦아졌고, 백성들은 정치의 혼탁을 피할 길 없이 겪어야 했다.

 문정왕후는 명종의 친정이 시작된 뒤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윤원형의 전횡이 문제가 되어도 꾸지람은 약했고, 때로는 “내가 아니었으면 주상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느냐”는 뉘앙스를 보였다는 전언도 남았다. 뇌물이 넘치는 창고와 사사로운 결탁은 민생을 짓눌렀고, 결국 들끓는 민심은 임꺽정의 난으로 분출했다. 국경도 편치 않았다. 1555년에는 을묘왜변이 일어나 건국 이래 유례없는 피해가 발생했지만, 관군과 의병이 힘을 모아 왜구를 몰아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종 대에 임시로 두었던 비변사가 상설화되어 외환 대응의 총괄 창구가 되었다.

 문정왕후는 불교 진흥에도 열심이었다. 간경을 간행하고 승려 보우를 후원했으며, 전국에 수많은 사찰을 공인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 유생들의 반발 상소가 빗발쳤으나, 그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말년에는 불사를 앞두고 목욕재계하던 중 병을 얻어 156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 명종은 비로소 완전한 친정에 나섰다.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기강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건강은 그리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1567년, 서른넷의 나이로 붕어했다. 아들 순회세자는 이미 열셋에 요절했으니 왕통은 다시 비어 있었다.

 결국 중종의 아홉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후사를 이었다. 방계에서 임금이 나온 첫 사례, 선조의 등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인종의 짧은 생애와 명종 대의 격랑은 서로 맞물려 있다. 상실을 품은 소년 군주의 미덕, 외척의 각축과 수렴청정, 사화의 연쇄와 변방의 위기, 불교 진흥과 유교 질서의 긴장, 비변사의 상설화와 제도의 변용. 인종에서 명종, 그리고 선조로 이어지는 이 궤적은 조선 전기가 얼마나 복합적인 균형 위에 서 있었는지 일깨운다. 미덕만으로는 정치를 버틸 수 없고, 명분만으로는 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감정은 절차로 제어되어야 하며, 권력은 공론과 타협할 수 있을 때 오래 간다. 인종의 단아한 이름과 문정왕후의 강한 그림자, 그리고 명종의 짧은 친정이 남긴 교훈은 그래서 길다.

반응형

'한국사의 흐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에서 대한제국이 되다(1)  (6) 2025.08.31
조선왕조, 임진왜란(2)  (4) 2025.08.25
조선왕조, 연산군(2)  (3) 2025.08.21
조선왕조, 연산군  (5) 2025.08.20
조선왕조, 폐비 윤씨  (3) 202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