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림에서 갈라진 동인과 서인의 대립
선조가 즉위한 1567년은 조선 정치의 무게중심이 본격적으로 사림에게로 옮겨간 분기점이었다. 사화 네 차례를 거치며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학맥과 도덕 명분을 축적한 사림은 마침내 조정의 주력으로 등장했다. 선조는 즉위 초 훈구의 잔영을 걷어내고 성리학적 규범에 충실한 인재들을 대거 기용했으나, 같은 사림 내부에서도 국정 운영의 방식과 인사 원칙을 두고 견해차가 깊어졌다. 그 균열은 곧 붕당의 형성으로 굳어졌다.
결정적 계기는 이조전랑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이조전랑은 삼사의 인사 추천을 좌우할 수 있는 관직이라 비록 품계는 높지 않아도 정치적 파급력이 컸다. 이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맞섰고, 결과적으로 김효원이 차지했다. 이어 후임으로 심충겸이 거론되자 김효원이 반대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이때부터 심의겸을 지지한 쪽을 서인, 김효원을 지지한 쪽을 동인이라 불렀다. 단지 거처가 서울 서쪽이냐 동쪽이냐의 구분에서 출발했지만, 곧 학맥과 성향, 지역 기반이 결합한 정치 집단으로 성장했다. 동인에는 이황·조식의 학통이, 서인에는 이이·성혼의 학통이 깊게 스며 있었고, 동인은 지방 사족의 비중이, 서인은 서울·경기 기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다.
붕당은 이상적으로는 공론의 장치를 통해 서로를 견제하며 정책의 균형을 이루는 장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긴장이 과열되면 국정은 곧바로 휘청거렸다. 1575년을 기점으로 동인이 우세했지만, 1589년 정여립 관련 사건이 터지며 판세가 뒤집혔다. 정여립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밀계가 조정에 올라오자, 서인의 거두 정철이 책임자가 되어 대대적 조사를 진행했다. 대동계의 조직과 움직임이 의혹의 핵으로 지목되었고, 사건은 ‘기축옥사’로 비화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관련자들이 줄줄이 처벌되었고, 동인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의 과잉 수사는 훗날까지 논란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서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거머쥐는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후사를 둘러싼 문제가 다시 정국을 뒤흔들었다. 적장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건의한 일이 선조의 심기를 건드렸다. 임금은 정철을 탄핵해 유배 보냈고, 이 ‘건저의 사건’을 둘러싸고 동인 내부에서 노선 갈등이 폭발했다. 정철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론과 강경론이 맞붙으면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했다. 남인은 절제와 절차를, 북인은 단죄와 단호한 개혁을 강조했다. 이후 국면마다 이 두 갈래의 연합과 이합집산이 반복되며 조정의 권력 지도는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선조 대 붕당정치는 단순한 파벌 싸움이 아니라, 학문과 인사, 제도의 원칙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재를 어떤 기준으로 뽑을 것인지, 언론 삼사의 간쟁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전쟁과 재정의 위기에 국가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각 붕당은 자신들의 논리와 명분으로 해답을 제시했다. 균형이 유지될 때는 공론이 살아 움직였지만, 균형이 깨질 때는 무고와 의혹, 응징이 정치의 언어를 대신했다. 훗날 영조·정조의 탕평 시도는 이 균형을 제도적으로 회복하려는 시발점이었으나, 세도정치의 그늘 속에서 다시 변질되기도 했다.
결국 선조 대에 시작된 동인·서인의 대립은 조선 정치의 장기 구조를 결정지었다. 그것은 폐단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론과 책임, 절차와 견제를 통해 국가를 움직이려 한 집단 지성의 실험이기도 했다. 당쟁의 그림자만 남기기에는, 그 속에서 축적된 논변과 제도 설계의 경험이 너무 크다. 문제는 언제나 ‘균형’이었다. 명분이 실용과 만나고, 견제가 협력으로 이어질 때 붕당은 제도였다. 그러나 명분이 적대가 되고, 견제가 보복이 될 때 붕당은 곧 재난이 되었다. 선조의 긴 통치는 이 간명한 진실을, 수많은 사람의 영욕과 함께 우리에게 남겼다.
더 나아가 이 대립은 임진왜란 직전의 외교·군사 판단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왜국의 동향을 둘러싸고 강경책과 신중론이 충돌했고, 인사 또한 붕당의 계산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위기 앞에서조차 공론의 합이 더디게 모였다는 반성은 훗날 수차례의 개혁 논의로 이어졌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그래서 단순한 흑백의 구도가 아니라, 성공과 실패가 교차한 한 시대의 집단적 학습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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