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3 예송논쟁 효종은 1649년 인조가 붕어하자 봉림대군의 신분으로 즉위해 조선의 제17대 임금이 되었다. 원래 왕위는 장자인 소현세자의 몫이었으나, 세자가 청에서 돌아온 뒤 급서하면서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효종의 효심을 여러 차례 전한다. 사소한 과일과 채소처럼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반드시 먼저 부왕께 올린 뒤에야 입에 댔다고 하고, 대대로 남은 가문 간의 반목 기록을 볼 때면 책을 덮고 탄식했다고 적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그는 강화에서 단식에 가까운 마음고생을 했고, 이어 소현세자와 더불어 청의 선양으로 볼모로 끌려갔을 때 형을 지극히 돌보았다. 귀국길에 청이 내민 후한 선물을 사양하고 그 대신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돌려 달라 청해 감탄을 샀다.. 2025. 9. 12. 조선에서 대한제국이 되다(2)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인조반정과 외교 정책 변화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서인 세력이 주도한 이 정변은 조선의 외교 정책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금(後金)이 부상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의 친명 정책은 현실과 맞지 않는 선택이었다.이괄의 난과 국방력 약화인조 즉위 초인 1624년, 이괄의 난이 발생했다.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2등 공신에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괄은 군대를 이끌고 한양을 점령하며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다.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피난했고, 결국 이괄의 부하들이 그를 죽이면서 반란이 진압되었.. 2025. 9. 1. 조선에서 대한제국이 되다(1) 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역사적 전개광해군의 즉위와 정치적 배경광해군은 선조의 서자로 태어나 복잡한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쳐 1608년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 과정은 조선 왕실 내부의 권력 갈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선조는 적자인 영창대군을 선호했으나, 광해군이 임진왜란 중 분조를 운영하며 보인 능력과 대신들의 지지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된 상태였으며, 동아시아 정세 또한 급변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만주 지역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광해군의 주요 정책과 업적광해군은 전후 복구와 국정 안정화에 주력했다.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대동법의 시범 시행이었.. 2025. 8. 31. 조선왕조, 임진왜란(4) 선조와 원균은 이순신의 공을 시기했고, 끝내 그를 모함해 의금부로 압송하게 했다. 혹독한 국문 끝에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우의정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1597년은 이순신에게 가장 비참한 해였다. 병든 모친이 아들을 만나려 길에 나섰다가 그만 숨을 거두었고, 죄인의 몸이던 그는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 사이 조정은 이순신을 배제한 채 원균에게 수군을 맡겼고, 원균은 칠천량으로 함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참혹한 패전을 당했다. 오랜 세월 공들여 키웠던 전선 150여 척이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살아 돌아온 배는 고작 열두 척뿐이었다. 이때 선조가 보내온 사과의 장계가 이순신 앞에 도착한다. “나의 모책이 어질지 못해 오늘의 욕됨을 보았다”는 통탄과 함께, 뜻밖.. 2025. 8. 27. 조선왕조, 임진왜란(3) 조선은 1392년 개국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대체로 평온했다. 반면 바다 건너 일본은 다이묘가 각지에서 전쟁을 벌이는 전국시대가 한 세기를 넘기며 이어졌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에 올라 정국을 틀어쥐고, 1590년 오다·도쿠가와와의 연쇄 연합과 압박 끝에 사실상 전국 통일을 마무리한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자 그는 대륙 원정의 야망을 드러냈다. 일본 내부에는 무리한 정벌이라는 이견도 있었으나, 도요토미는 조선을 관문으로 삼아 명을 치겠다는 목표를 굽히지 않았다. 대마도를 경유해 정보망을 가동하고, 조선 연안과 내륙의 길을 탐문해 지도를 확보했으며, 각 번에 병력을 할당해 진군선을 정비했다. 조선도 이상 기류를 감지했다. 대마도주를 통해 전해진 도요토미의 요구는 “명정벌에 길을 열라”는 것이었.. 2025. 8. 26. 조선왕조, 임진왜란(2) 1. 사림에서 갈라진 동인과 서인의 대립 선조가 즉위한 1567년은 조선 정치의 무게중심이 본격적으로 사림에게로 옮겨간 분기점이었다. 사화 네 차례를 거치며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학맥과 도덕 명분을 축적한 사림은 마침내 조정의 주력으로 등장했다. 선조는 즉위 초 훈구의 잔영을 걷어내고 성리학적 규범에 충실한 인재들을 대거 기용했으나, 같은 사림 내부에서도 국정 운영의 방식과 인사 원칙을 두고 견해차가 깊어졌다. 그 균열은 곧 붕당의 형성으로 굳어졌다.결정적 계기는 이조전랑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이조전랑은 삼사의 인사 추천을 좌우할 수 있는 관직이라 비록 품계는 높지 않아도 정치적 파급력이 컸다. 이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맞섰고, 결과적으로 김효원이 차지했다. 이어 후임으.. 2025. 8. 25.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