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1392년 개국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대체로 평온했다. 반면 바다 건너 일본은 다이묘가 각지에서 전쟁을 벌이는 전국시대가 한 세기를 넘기며 이어졌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에 올라 정국을 틀어쥐고, 1590년 오다·도쿠가와와의 연쇄 연합과 압박 끝에 사실상 전국 통일을 마무리한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자 그는 대륙 원정의 야망을 드러냈다. 일본 내부에는 무리한 정벌이라는 이견도 있었으나, 도요토미는 조선을 관문으로 삼아 명을 치겠다는 목표를 굽히지 않았다. 대마도를 경유해 정보망을 가동하고, 조선 연안과 내륙의 길을 탐문해 지도를 확보했으며, 각 번에 병력을 할당해 진군선을 정비했다.
조선도 이상 기류를 감지했다. 대마도주를 통해 전해진 도요토미의 요구는 “명정벌에 길을 열라”는 것이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1590년 선조는 정세 파악을 위해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정사에는 서인 황윤길, 부사에는 동인 김성일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 두 사람의 평가는 극명히 갈렸다. 황윤길은 도요토미의 눈빛과 기세에서 전쟁의 의지를 읽었다고 보고했고, 김성일은 허세가 과장되었을 뿐 실제 침공 의지는 약하다고 보았다. 이미 조정 여론은 과도한 대비에 회의적이었다. 군량을 축내느니 백성의 부담을 덜자는 기류가 강했다. 그럼에도 1591년부터 성곽 보수, 진법 점검, 병기 보충 등 제한적 대비가 시작되었으나, 비용과 노역이 만만치 않아 각지에서 불만이 터졌다.
1592년 4월 13일 새벽, 부산포 앞바다는 일본 함선으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도요토미가 투입한 1차 파병은 대략 20만, 예비·수송 인력을 합하면 28만6천 명 규모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전국시대의 혈전으로 단련된 보병 중심의 정예였고,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전래된 조총으로 대량 무장했다. 조총은 숙련 없는 병사도 단기간에 운용할 수 있는 신식 화기였고, 사수 교대식 연발 전술로 단점을 보완했다. 동시에 기독교와 서양의 항해·상업 문화 유입은 일본의 시야를 넓히는 매개가 되었다.
일본군 선봉 5만은 상륙 직후 삼로로 갈라져 번개처럼 북상했다. 조선군은 준비와 지휘가 엇박자였고, 초전은 연패로 굴렀다. 여진 토벌로 이름 높던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기병 중심 결전을 택했다. 조령에 요새 방어선을 치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가 갠 들판의 논밭은 기병에 불리한 진창이었다. 반면 일본 조총수는 느린 기마대의 표적을 차분히 갈아 넣을 수 있었다. 탄금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신립은 자결했다. 충격파는 곧장 한양으로 번졌다.
적은 거침없이 올라왔다. 선조는 선택지를 잃었다. 장대비 속 궁궐을 빠져나온 어가 뒤를 따른 이는 백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20일도 안 돼 한양은 함락됐다. 일본군은 성주가 항복하거나 자결하면 전투가 끝나는 자기들의 상식대로 전개되리라 보았으나, 조선 국왕이 성을 비우고 북상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선조의 피난에는 비겁하다는 평이 따라붙지만, 결과만 보면 시간을 벌어 반전을 준비한 선택이었다. 그 사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고, 무엇보다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를 장악하며 전세를 뒤집는 결정적 시간을 만들어 냈다. 선조의 피난은 의주까지 이어졌고, 그는 불안에 떨며 “내부하겠다”는 말까지 입에 올렸다. 결국 명에 원병을 요청했고, 명은 출병을 결정한다.
전쟁 초 조정은 분조를 설치해 광해군에게 책임을 맡겼다. 젊은 세자는 전장을 순시하고 의병을 독려했다. 동궁이 앞장서 국난에 나섰다는 사실은 흔들리던 민심을 다잡는 상징이 되었다. 지방의 유생과 승려, 농민·상인까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결사대를 꾸렸다.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는 붉은 옷을 맞춰 입히고 보급로를 타격하는 유격전으로 적을 교란했다. ‘홍의장군’이라 불린 그의 전술은 병력·장비 열세를 창의성으로 메운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더욱 압도적 장면이 이어졌다. 이순신은 수륙 연계 보급선을 연달아 끊어 일본 육군의 북상·주둔 능력을 마비시켰고, 수군 박멸을 시도한 적의 기도는 번번이 좌초했다.
전황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명과 일본은 조선을 배제한 채 화의를 타진했다. 선조가 전시 지휘권을 명에 위임한 탓에 외교의 무대에서 조선은 주변부로 밀렸다. 명은 철군과 사죄를, 일본은 황녀 봉진과 조선 영토 분할을 요구했다. 입장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교섭이 파탄나자 도요토미는 재침을 명한다. 1597년, 약 14만의 병력이 다시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임진·정유 7년의 전쟁은 조선의 구조를 뒤흔든 분기점이었다. 초기의 방심과 대비 부족, 지휘의 혼선은 참담한 대가를 불렀다. 그러나 분조 체제의 유지, 의병의 자발성과 창의적 전술, 해상 제해권의 확보, 명과의 연합 작전은 패망을 막아낸 축이었다. 전쟁 동안 국토는 불타고 인구·재정이 급감했지만, 동시에 조선은 지형·해로·보급의 중요성을 뼛속까지 학습했고, 군제·세제·문서 체계의 전면 손질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조총과 서양식 군율·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급속히 현대적 전술을 체화했으나, 보급·지속전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명은 원조를 통해 체면을 세웠지만 재정과 국력의 균열이 도드라졌다. 세 나라가 각자의 그늘과 그늘의 대가를 확인한 전쟁이었다.
선조의 망명성 발언과 우왕좌왕, 광해군의 분조 운영, 의병의 분전, 이순신의 해전, 명·일의 밀고 당기기, 그리고 1597년의 재침까지—이 모든 고비의 연쇄는 “평화는 공짜가 아니며, 대비는 비용이 아니라 보험”이라는 당연한 진실을 증명했다. 조선은 이 전쟁을 기점으로 군정과 재정, 외교의 삼박자를 다시 짜 맞춰야 했다. 이후의 국정 논쟁과 당쟁, 개혁과 반동의 진자 운동은 바로 이 거대한 상흔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