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왕조, 임진왜란(4)

by 커다란 꿈나무 2025. 8. 27.
반응형

 

 선조와 원균은 이순신의 공을 시기했고, 끝내 그를 모함해 의금부로 압송하게 했다. 혹독한 국문 끝에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우의정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1597년은 이순신에게 가장 비참한 해였다. 병든 모친이 아들을 만나려 길에 나섰다가 그만 숨을 거두었고, 죄인의 몸이던 그는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 사이 조정은 이순신을 배제한 채 원균에게 수군을 맡겼고, 원균은 칠천량으로 함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참혹한 패전을 당했다. 오랜 세월 공들여 키웠던 전선 150여 척이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살아 돌아온 배는 고작 열두 척뿐이었다. 이때 선조가 보내온 사과의 장계가 이순신 앞에 도착한다. “나의 모책이 어질지 못해 오늘의 욕됨을 보았다”는 통탄과 함께, 뜻밖에도 수군을 포기하고 육전에 합류하라는 지시가 함께 내려왔다. 바다는 더는 답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순신은 곧바로 상소를 올렸다.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 척이 남아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맞설 것이니, 적이 감히 우리 바다를 넘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육지로 올라오라는 명을 조목조목 꺾은 이 한 줄의 결연함은 곧 국난 타개의 분수령이 된다. 곧 추가로 한 척을 더 보태 열세 척이 된 판옥선은 전열을 가다듬었고, 장군은 마지막 승부처를 명량으로 정했다.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울돌목, 가장 좁은 물목은 채 삼백 미터가 되지 않고, 물살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며 포효한다. 밀물과 썰물의 교대가 만드는 소용돌이는 대형 함대의 협동을 무너뜨리는 요람이자 무덤이었다.

 

 이순신의 구상은 단순하지만 과감했다. 넓은 바다에서 맞부딪히는 대신, 바람과 물살이 우는 협수의 목을 틀어쥔다. 열세 척은 해협 입구에 얇고 길게 늘어서 적의 침투 폭을 강제로 좁혔다. 133척을 이끌고 밀려드는 왜선은 좁은 물목에서 일거에 진형을 펴지 못했다. 앞줄이 얕은 각도로 들어오면 곧 역류가 닥치고, 뒤에서 밀어닥친 배는 서로의 미간을 들이받았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배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방향타를 잃었고, 조총 사수는 흔들리는 갑판에서 조준조차 힘들었다. 반면 판옥선은 높은 현측과 견고한 구조를 등에 업고 일점사로 적의 사령선부터 찢어 놓았다. 북과 피리로 신호를 맞춘 기동과 닻줄 운용, 물살의 변화를 읽는 감각이 더해지자 불길은 선미에서 선수로 번지고, 포연은 해협을 가렸다. 포성 사이사이 장군의 고함과 지휘가 이어졌다. “앞을 보라. 물살을 보라. 두려움을 끊어라.” 일본 수군은 끝내 질서를 잃고 후퇴를 시작했다. 이렇게 명량의 기적은 만들어졌다. ‘열세 대 백삼십삼’이라는 불가능의 등식을 자연과 전술, 의지로 뒤집은 날이었다.

 

 명량의 승전은 단지 해전 한 번의 기쁨이 아니라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신호였다. 해로가 막히자 일본 육군의 북진은 보급난으로 지체되었고, 육상 전선의 압박도 완화되었다. 장수와 군졸은 “바다가 살아 있다면 나라가 산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때부터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서는 전쟁 지속 여부를 둘러싼 피로와 균열이 커졌다. 결정타는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이었다. 유언에는 철군 지시가 담겼다. 일본군은 점차 후퇴했고,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 최후의 무대가 노량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수군은 기습을 개시했고 양측 함선이 뒤얽히며 격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여느 때처럼 선두에 섰다. 포화가 빗발치던 와중, 장군은 적탄에 가슴을 맞았다. 그는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명했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주변 장수들은 피를 삼키며 전투 지휘를 이어갔고, 조선 수군은 끝내 대승을 거두었다. 전장의 함성 속에서 장군의 부재가 전해지자 모두가 땅을 치며 곡했다. 수군의 혼은 그렇게 파도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가 확보한 제해권과 시간은 나라를 지탱한 마지막 기둥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은 조선 왕조가 겪은 최대의 시련이었다. 들판은 불타고 고을은 비었으며, 실록에는 기근과 전염, 아사와 참혹한 풍문이 연달아 기록되었다. 국경의 성곽과 토목은 무너졌고, 장정은 흩어졌으며, 관리 기록과 장부는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도 평화는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정은 공신 책봉과 전후 복구, 명과의 외교, 일본 포로의 송환, 의병의 보상, 군제의 재편을 놓고 연일 다퉜다. 당쟁은 더 거칠어졌고, 민생은 더디게 회복되었다. 선조는 전란의 뒷수습을 온전히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국왕의 피난과 우왕좌왕은 긴 비난을 남겼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시의 권한을 분조로 나누어 광해군에게 맡긴 선택은 민심을 붙드는 데 분명한 효용이 있었다. 의병의 분전, 곽재우를 비롯한 수많은 이름 없는 장정의 게릴라, 승군의 참여,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에서의 연전연승—이 모든 것이 합쳐져 나라의 숨통을 이어 주었다.

 

 명량의 교훈은 단순하다. 수와 장비의 열세가 반드시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형과 조류, 시간과 사거리, 화력과 기동을 꿰어 하나의 작전으로 묶어내는 머리, 패주를 막아 세우는 심장, 공포를 짓누르는 지휘가 있다면, 패색 짙은 전장도 뒤집을 수 있다. 이순신은 승리를 창조한 영웅이기 전에, 끝까지 책임을 포기하지 않은 지휘관이었다. 칠천량으로 무너진 함대를 일으켜 세운 것도, 두려움에 질린 군졸에게 전열을 지키게 한 것도, 물결을 읽고 적의 허를 찌른 것도, 모두 지휘의 힘이었다. 그의 마지막 명은 그래서 더 뼈아프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장수의 죽음보다 전장의 사기를 먼저 생각한 사람, 개인의 영광보다 공동의 승리를 먼저 택한 사람—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조선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조선은 다시 길을 찾는다. 군정은 진관과 속오의 현실화를 거쳐 재편되고, 재정은 호적·양안의 정비로 새 틀을 마련한다. 외교는 명과 일본 사이의 좁은 틈에서 생존의 기술을 익히고, 바다는 더는 잊힌 경계가 아니게 된다. 그 모든 변화의 출발점에 명량과 노량, 그리고 한 장수의 결기가 있었다. 수백 척의 적선이 물목을 가득 메우던 그날, 열세 척의 배가 나라의 내일을 지켜냈다. 그 진실은 오늘도 파도 소리와 함께 되새겨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