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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흐름

예송논쟁

by 커다란 꿈나무 2025.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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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1649년 인조가 붕어하자 봉림대군의 신분으로 즉위해 조선의 제17대 임금이 되었다. 원래 왕위는 장자인 소현세자의 몫이었으나, 세자가 청에서 돌아온 뒤 급서하면서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효종의 효심을 여러 차례 전한다. 사소한 과일과 채소처럼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반드시 먼저 부왕께 올린 뒤에야 입에 댔다고 하고, 대대로 남은 가문 간의 반목 기록을 볼 때면 책을 덮고 탄식했다고 적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그는 강화에서 단식에 가까운 마음고생을 했고, 이어 소현세자와 더불어 청의 선양으로 볼모로 끌려갔을 때 형을 지극히 돌보았다. 귀국길에 청이 내민 후한 선물을 사양하고 그 대신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돌려 달라 청해 감탄을 샀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처럼 가족과 백성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효종에게, 부왕을 무릎 꿇린 청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상대였다. 즉위 초 그는 북벌을 입에 올렸다. 치욕을 설욕하고 국권을 세우자는 뜻이었고, 명분으로도 백성의 분노를 한데 모으는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왕권의 주도 아래 군제를 정비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 첫 고비가 김자점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권세를 누리던 김자점은 점차 사리사욕에 치우쳤고, 소현세자계 견제에도 관여했다는 의혹을 샀다. 인조 사후에는 상소가 빗발쳤고, 1651년 역모 혐의가 드러나자 효종이 친히 신문했다. 김자점은 자백 끝에 극형을 받고 생을 마쳤고, 이 사건으로 조정의 친청 성향 인맥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무렵 새롭게 부상한 세력이 있었다. 흔히 ‘산림’이라 불린 재야의 거유들이다. 이들은 전란과 치욕을 겪은 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과 수양에 몰두하며 명망을 쌓았다. 조정은 차츰 이들을 불러들였고, 서인계는 산림을 정신적 구심으로 삼았다. 김집, 송시열, 송준길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고, 다른 노선에서 윤휴처럼 재야의 권위를 지닌 학자도 있었다. 흥미롭게도 즉위 직전 세자계승 문제에서는 산림 다수가 소현세자의 아들을 옹립하자고 본 반면, 김자점은 봉림대군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효종이 산림을 초빙한 까닭은 분명했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상대적으로 약했던 자신의 정통성을 메우고, 재야의 권위를 국정 동력으로 바꾸려는 정치적 판단이었다.

 산림과 효종이 공유한 대의는 ‘북벌’이었으나, 그 방법론은 같지 않았다. 효종의 구상은 군제 강화와 실전 대비였다. 그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중심으로 병력과 화기를 정비하고, 수도권 방위의 구멍을 메우려 했다. 반면 송시열 등 서인의 ‘북벌론’에는 도덕 정치·민생 안정의 색채가 짙었다. 우선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정사를 바로 세워 기강을 회복해야 하며, 군비 확충은 그 결과로 따라와야 한다는 논리였다. 현실적으로 청을 당장 무력으로 칠 수 없다는 인식도 깔려 있었다. 이처럼 북벌은 명분이자 국정 기조를 묶는 정치 언어로서 기능했고, 때로는 실질적 개혁의 속도를 늦추는 구실로도 쓰였다.

 효종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5 군영 체제의 뼈대를 다지고(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수어청 등), 성과 포대를 손보며 화포를 개량했다. 1653년에는 뜻밖의 ‘현대화 촉매’가 조선에 닿았다. 네덜란드 선원 하멜 일행이 폭풍에 표류해 제주에 상륙한 것이다. 이들은 한양으로 이송되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일정 기간 군사 업무를 도왔다. 효종은 이들을 통해 유럽식 머스킷과 시한신관, 화포 운용법 같은 정보를 접했고, 군기시와 장인들을 동원해 분해·복제에 도전했다. 조총보다 개량된 머스킷은 장전 절차가 단순했고, 부대 단위의 일제사격을 훈련하면 화력 운용이 한층 효율적이었다. 비록 전면 도입은 여건상 제한적이었으나, 외래 기술을 흡수해 군제에 반영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후의 변화를 예고했다.

 대내적으로는 전란 이후의 피폐를 달래는 정책이 병행되었다. 공납의 민폐를 줄이려 대동법을 전라도까지 확대 적용하여(경기—인조, 충청·전라—효종·현종 시기 확대) 수취 체계를 곡물·포목 중심의 균일화로 바꾸었다. 이는 곧 지방 수취의 투명성과 국가 재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토대가 되었다. 아울러 호적·양안을 손질해 군역·조세의 기반을 고르게 하려 했고, 변방의 수비선을 재조정해 압록·두만의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북벌의 명분 아래 이뤄진 이런 ‘내실 쌓기’는 단기 성과가 눈에 띄지 않아도 국가 운영의 체력을 천천히 복구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재위 10년, 나이 마흔하나. 머리에 돋은 종기가 급격히 악화하자 어의 신가귀가 침을 놓았다. 하지만 출혈이 멎지 않았고, 쇼크로 임금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어의는 대죄 끝에 중형을 받았다. 장례를 치르려 관을 들이니 미리 짜 둔 관이 작아 다시 손을 봐야 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평소 무예를 부지런히 익혀 어깨가 넓고 체격이 건장했던 탓이라 했다. 북벌을 말로만 되뇌다 떠난 군주가 아니라, 국방과 재정의 틀을 현실에 맞추어 꾸준히 다듬은 군주—효종을 그렇게 기억하는 이유다.

효종의 북벌은 결국 창끝이 압록강을 건너는 광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땔감처럼 쌓아 올린 병제 정비, 화기 개량, 수취 개혁, 경계 강화는 이후 현종·숙종 대의 국정 운영을 지탱하는 밑천이 되었다. 산림과의 긴장, 명분과 현실의 간극, 전란의 상처 위에 새 틀을 놓으려는 고심—그의 짧지 않은 노력은 “설욕”이라는 한 글자에 갇히지 않는다. 나라의 체력을 되찾아 언젠가 올 수 있는 기회를 대비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제도와 숫자로 바꾸려 한 성실함. 효종의 시대는 그 두 축으로 굴러갔다. 결국 국가는 명분과 실력, 두 바퀴가 함께 돌아갈 때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그의 재위 10년은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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