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무렵, 한반도와 인근 지역에서는 또 다른 초기 국가들이 성장하고 있었어요. 이들은 철기 문화의 토대 위에서 부여, 초기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사회를 형성했습니다. 더 강력한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를 손에 쥔 채 제각기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것입니다.
함경도와 강원도 해안 지역 일대에 존재한 옥저와 동예는 풍부한 자원을 자랑했습니다. 동해안에서는 해산물을 넉넉히 얻을 수 있었고 비옥한 토지에는 오곡이 풍성했다고 해요. 지리적인 특성이 경제적 풍요를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어려운 위치이기도 했어요. 두 나라에는 왕이 없었고 '읍군'이나 '삼로' 등의 군장이 부족사회를 이끌었죠. 옥저와 동예는 나날이 강성해지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서 제대로 기를 못 펴다가, 결국 고구려에 흡수되고 맙니다.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지만, 그들의 삶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어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옥저에는 독특한 혼인 풍습인 '민며느리제'가 있었습니다. 여자아이가 10세가 되면 미래의 남편 집에서 키우고, 성인이 되면 잠시 본가로 돌아갑니다. 이때 남편이 될 남자가 일정한 금액을 지불해야만 신부를 다시 데려갈 수 있었어요. 이는 결혼을 위해 금액을 지불하는 일종의 매매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습은 대체 왜 생긴 걸까요? 이런 풍습은 주로 노동력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데, 딸의 노동력을 상실한 가족에게 일종의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옥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임시로 매장했다가 시체가 썩으면 뼈만 추려내 가족 공동 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골장제' 풍습이 있었어요.
한편 동예의 씨족 집단은 산과 강을 경계로 구분된 자신들만의 생활 구역에서 살았습니다. 이 구역 안에서 사냥, 낚시, 농사를 통해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했고 다른 구역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폐쇄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어요. 만약 다른 구역을 허락 없이 넘어가면 소, 말, 노비로 죗값을 치러야 했는데, 이를 '책화'라고 합니다. 더불어 같은 씨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족외혼을 엄격하게 지켰어요. 이러한 풍습은 동예에 여전히 씨족 공동체의 전통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성장한 삼한
삼한은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 걸쳐 존재한 마한, 변한, 진한을 통칭합니다. 마한은 54개 소국이 뭉친 연맹체였고, 변한 과 진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됐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처음부터 마한, 변한, 진한으로 뭉쳐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원래 한반도 중남부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여러 토착 부족 집단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쪽의 고조선에서 정세가 혼란해질 때마다 유이민들이 우르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위만에게 왕위를 뺏긴 고조선 준왕도 측근들과 남쪽으로 내려와 스스로를 한 왕이라 칭했다고 하지요. 이때뿐이 아닙니다.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도 고조선 사람들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때 북쪽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철기 문화까지 함께 전해졌지요.
이렇게 토착민사회에 다양한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점차 여러 소국이 저마다 뭉치며 마한, 변한, 진한이 형성됐습니다. 철제 농기구 사용은 농업생산력과 인구를 증가시키며, 계급 분화를 더 빠르게 촉진하는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남들보다 앞서가는 몇몇 소국들이 눈에 띄게 되지요. 마한의 백제국, 진한의 사로국, 변한의 구야국은 각각 백제, 신라, 가야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삼한에는 '소도'라는, 솟대의 원형이 되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소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나라에는 각각 장수가 있는데 그중에 큰 자는 신지라 부르고 그다음 가는 자는 읍차라고 한다. 귀신을 믿어서 나라의 읍들이 각기 한 사람씩 세워 천신에게 제사하는 것을 주관케 하였으니 그 이름을 천군이라 하였다. 나라마다 각각 소도라 부르는 별읍이 있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2. 만주 땅을 차지한 부여의 성장
고조선이 사라진 후부터 고구려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기 전까지, 만주의 패권은 부여의 것이었습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인 기원전 3~2세기경,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부여는 5세기까지 기나긴 역사를 이어갔어요.
부여 사람들은 드넓고 비옥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목축도 겸했습니다. 일찍이 수준 높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췄으니 빠르게 연맹 국가 체제를 이룰 수 있었지요. 중앙은 왕이 다스렸고, 중앙에서 사방으로 뻗은 길을 중심으로 사출도가 있었습니다. 사출도는 각각의 부족장인 '대가'들이 다스렸는데 특이하게도 대가는 가축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말, 소, 돼지, 개를 따서 각각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으로 불렀어요. 부여에서 목축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인은 흰옷을 좋아했다고 해요. 신발은 가죽신을 신었고 외국에 나갈 땐 비단옷 등을 즐겨 입었다고 합니다. 지배 계층은 그 위에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했다고 해요. 고대의 부여인이 고상하게 예복을 차려입은 모습, 상상되시나요?
한편으로 부여에는 고조선처럼 엄격한 법이 있어서, 살인을 저지른 죄인은 죽음으로 벌하고 그의 가족은 노비로 삼도록 했습니다. 이 법을 통해부여에도 신분제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노동력을 중시했다는 점도 알 수 있지요.
또한 북방 민족이 흔히 그러듯 '형사취수제'의 풍습도 가지고 있었어요. 형이 죽으면 남겨진 형의 부인과 결혼해서 가정과 재산을 지키는 것입니다. 12월이 되면 모두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음식을 먹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제천의식을 '영고'라고 부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영고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은력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에서 대회를 열어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영고라고 한다. 이때 형옥을 중단하여 죄수를 풀어주었다.
그런데 일찍이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잘 나가던 부여는 대체 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멸망해 버렸을까요? 3세기에 부여는 주변 정세 변화에 크게 휘발립니다. 위쪽에선 선비족이 몸집을 불리며 압박하고 아래쪽에선 고구려가 압박하는 형국이니, 가운데 끼어있는 부여는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부여는 적들이 침략하기 딱 좋은 평야 지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계속 쳐들어오는 외적을 철통같이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당시 이웃 나라 중국은 난세였습니다. 통일왕조가 무너진 이후 수많은 나라가 난립하던 5호 16국 시대였어요. 한족 입장에서 다섯 오랑캐라 칭한 '5호' 중에는 신비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다른 민족과 거침없이 싸우고 다닌 고대 유목 민족입니다. 결국 285년, 부여와 선비족 사이에 큰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선비족 모용외가 부여에 쳐들어오더니 수도를 파괴하고 약 1만 명의 포로를 잡아간 겁니다. 이때 부여가 얼마나 크게 무너졌냐면, 선비족을 막지 못한 국왕 의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른 왕실 사람들은 북옥저로 피난 가는 처지에 이르렀어요.
이후 337년, 선비족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전연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원래 모용황이 세운 나라의 이름은 '연'이지만 나중에 등장한 '후연'과 구분하여 '전연'이라고 부르게 됐어요. 전연이 346년에 부여를 또 공격합니다. 부여는 중심축을 잃고 또다시 붕괴했지만 흩어진 잔류 세력이 계속해서 부여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494년, 고구려에 완전하게 편입되면서 부여는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부여의 숨결은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져 한민족의 역사적 뿌리로 남습니다. 부여 출신 주몽이 토착 세력과 손잡아 고구려를 세웠고, 백제 또한 부여 출신인 온조가 토착 세력과 연합해 세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백제는 한때 국명을 남부여로 바꾸기까지 했잖아요. 백제가 부여를 계승했음을 선포한 성왕에게서 부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훗날 백제가 부여의 정통임을 선포하며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려 했다는 것은, 부여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또 아득한 고대국가 부여의 숨결은 대한민국까지 닿아 있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가 있던 곳은 오늘날에도 '부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