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역사는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의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온 주몽은 기원전 37년,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를 건국했어요. 대체 주몽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신화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예요.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입니다. 천제의 아들이라면 천자, 즉 왕을 의미하며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으로 추정할 수 있어요. 어느 날 유화를 만난 해모수가 그녀와 관계를 맺고 떠나버립니다. 유화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허락도 없이 관계를 맺었다며 유화의 부모는 그만 딸을 내쫓아버렸어요.
해모수의 아이를 가진 유화는 동부여의 금와왕을 만나게 됩니다. 금와왕은 해모수의 손자였어요. 해모수는 이미 아들에 손자까지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화는 금와왕의 동부여 왕궁에서 지내게 되고, 얼마 후 아들 주몽을 낳습니다. 주몽은 동부여 왕궁에서 금와왕의 7명의 아들과 함께 성장했지요.
어릴 때부터 활을 참 잘 쏘던 주몽은 용맹한 기질이 남달랐어요. 게다가 해모수의 아들이잖아요. 이렇게 유망한 주몽을 시기 질투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였습니다. 금와왕의 왕위를 물려받을 대소는 눈에 거슬리는 주몽을 죽이고 싶었어요. 결국 주몽은 위협이 도사리는 동부여를 떠나 졸본부여로 망명한 것입니다.
주몽이 도착한 졸본부여에는 이미 토착 사회가 형성돼 있었어요. 이 지역은 원래 '구려'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죠. 주몽은 이곳에 살던 부족장의 딸 소서노와 결혼해서 세력 기반을 다지고 마침내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1. 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은 춥고 척박한 산악 지대라 농사짓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나 거칠고 불편한 자연환경은 오히려 고구려인의 용맹하고 진취적인 기질의 원천이 되었죠. 고구려인의 정복적인 기질은 훗날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됩니다.
졸본의 위치는 오늘날 환인으로 추측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으로 천도가 이뤄졌어요. 국내성은 중국 집안 지역에 있었습니다. 국내성이 고구려의 가장 오랜 기간 도읍이었던 만큼, 집안 지역에선 현재까지도 고구려 시대 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어요. 그리고 훗날 5세기 장수왕 때 천도한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가 됩니다.
초기 고구려는 5 부족 연맹체로서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의 다섯 부족이 느슨한 연합을 이룬 형태였어요. 각 부족장이 모여 제가 회의를 통해 국정을 논의했고, 왕은 연맹의 수장으로서 미약한 권력을 가졌지요. 1세기 후반쯤 되면 고구려는 슬슬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합니다. 6대 태조왕 때 왕의 입김이 세지자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고국천왕이 농부 을파소를 최고 관직에 앉힌 이유
고구려의 9대 왕인 고국천왕은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어요. 연나부(절노부)에서 왕비를 뽑고 연대를 강화한 뒤 5부를 전체적으로 통제하려 합니다. 원래 각 부를 알아서 통제하던 수장들은 왕의 적극적인 개입이 맘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연나부가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합니다.
고국천왕은 나머지 4부의 권세를 꺾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어요. 그래서 농사짓던 을파소를 불러다 국상의 자리에 앉힙니다. 이에 각 부의 수장들은 입이 떡 벌어졌어요. 5부 기득권 출신도 아닌 농부를 당대 최고 관직인 국상 자리에 앉히다니, 심하게 파격적인 등용이었습니다.
을파소는 2대 왕인 유리명왕 때 대신으로 활약한 을소의 후손으로, 성품이 굳세며 지혜롭다고 평가받던 인재였어요. 원래 고국천왕은 그에게 장관직을 권했는데 을파소가 이를 이런 말로 거절합니다.
"신은 둔하고 느려서 엄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어진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시고 대업을 이루소서."
농사짓던 을파소가 왕을 도와 난국을 돌파하려면 장관 정도의 직책으론 어림도 없었지요. 그의 속마음을 눈치챈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으면 전부 멸족시키겠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독자적인 4부 세력은 약해지고, 점차 왕 아래에 소속되는 형태로 통합되기 시작했어요. 각 부의 지배층은 독자적 권력이 약해져 수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중앙 귀족과 관료로 변모합니다. 게다가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며 국왕의 위상은 더 강력해졌어요. 훗날 고구려 왕에게는 '태왕'이라는 독자적인 칭호가 사용됩니다.
한편 을파소는 왕이 보여준 두터운 신뢰에 보답하려는 듯 고구려의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인재 발굴과 경제 정책 등 다양한 방면으로 통치 체계를 재정비했지요. 특히 구국천왕 대에 실시된 '진대법'은 한국사 최초의 사회복지 제도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의미가 있답니다.
진대법은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게 한 구휼 제도인데, 이 제도 또한 왕권 강화에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귀족들이 비싼 이자를 받아 돈놀이하는 고리대가 성행했는데, 여기에 희생된 농민들이 귀족의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진대법은 농민이 귀족의 노비로 전락하지 않도록 도와주어 귀족의 세력 확장을 억누른 동시에, 계속해서 왕의 백성으로서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군역의 의무를 지도록 하는 효과적인 제도였습니다. 이러한 춘대추납 구휼 제도는 훗날 고려와 조선에서도 의창과 환곡으로 이어집니다.
3. 낙랑군과 대방군을 모두 퇴치한 미천왕
3세기 동북아시아에서는 격동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후한의 조정이 부패할 대로 부패하자 불만이 폭발한 농민들은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어요. 난세를 타개하겠다며 대륙 전역에서 군웅이 할거했고 결국 그 유명한 위, 촉, 오의 삼국시대가 시작됩니다. 당시 요동반도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의 패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를 보면 동북아의 패자를 가늠할 수 있었어요. 3세기 초, 요동반도는 공손씨가 차지하고 있었지요. 위나라는 고구려와 함께 힘을 합쳐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킵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있던 공손씨가 사라지니까 이제 고구려와 위나라가 국경을 마주하게 된 거예요. 두 나라 사이엔 급격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게 되었어요.
결국 동천왕은 위나라가 장악하고 있던 요동반도의 서안평을 먼저 쳤어요. 그러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반격을 가하며 고구려 도읍의 환도성을 함락해버렸죠. 환도성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을까요? 고구려 도성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어요. 일반적으로 평지의 왕궁성과 방어용 산성이 한 세트로 묶여 있었지요. 평상시에 황은 평지에 있는 국내성에서 지내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환도성으로 이동했습니다.
고구려는 위나라의 침공에 타격을 입었지만, 머지않아 상황이 나아졌어요. 위나라가 사라진 것입니다. 위나라 말기부터 권력을 독점하던 사마씨가 위나라 황제를 내쫓더니 서진을 세워 삼국 통일을 이뤘어요. 그런데 북쪽에서 유목 민족들이 쳐들어오자 서진은 금세 멸망했습니다. 간신히 도망친 사마씨 황족은 남쪽에 동진을 세워서 진의 명맥을 이어갔어요. 그리고 북쪽을 차지한 유목 민족들은 제각기 나라를 세웠고요. 온갖 왕국이 난립하던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기회를 잡은 고구려 미천왕은 맹수처럼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합니다. 서안평 공격에 성공하더니 낙랑군과 대방군까지 모두 정복했어요. 고조선 멸망 이후 한반도에 설치돼 있던 한군현 중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던 낙랑군 그리고 낙랑에서 분리된 대방군까지 모두 축출한 것입니다. 이렇게 미천왕은 고구려의 초기 발전을 견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