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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의 시작

by 열매와 꿈나무 2025. 7. 25.

고조선과 삼국시대

 1. 한국사의 문을 연 고조선

 고조선은 국가의 가장 초기 단계인 군장국가로 출발해서 연맹왕국 단계까지 발전한 나라입니다. 고려 후기에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담겨 있는데, 그 속에 고조선 건국에 관한 여러 단서가 숨어 있습니다.

 먼저 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는 각각의 부족 세력을 의미합니다. 환웅 부족이 호랑이를 토템으로 믿는 부족을 멸망시켰고, 곰을 토템으로 믿는 웅녀 부족을 정복해서 흡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이렇게 환웅 부족과 웅녀 부족 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하여 한민족의 시조가 됩니다.

 단군신화의 특징은 선민사상을 통해 지배자의 권위를 강조 했다는 점입니다. 천신의 핏줄을 이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로 지배자의 정통성을 확보했지요. 국가의 시조가 하늘에서 강림했다는 내용은 여러 고대국가의 건국 설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유형입니다. 예를 들어 주몽은 천신인 해모수의 아들이고, 박혁거세와 김수로왕도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알에서 태어났지요. 더불어 단군신화에 깃든 홍익인간 이념에는 이타주의와 인본주의가 녹아 있습니다.

    

 2. 고조선 건국의 비밀

 단군이 세운 나라 이름은 원래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배자가 단군에서 위만으로 바뀐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단군조선에서 '옛 고'를 붙였어요. 여기에 더해 1392년에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국명이 또 겹치니까 단군이 세운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고조선이라고 하면 단군조선부터 위만조선까지 모두 포괄하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를 말합니다.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랴오양 일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연나라와 충돌할 즈음에는 한반도 전역에 비파형 동검에서 발전한 세형동검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왕검성으로 중심지를 옮긴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 걸쳐 존재한 고조선은 옆 나라 중국과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특히 기원전 3세기경에 중국은 대혼란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어요. 이 어지러운 시기에 수많은 유이민이 고조선으로 건너오고, 이 후 진한 교체기에 또다시 수많은 유이민이 고조선으로 우르르 넘어옵니다.

 

 3. 위만조선과 철기 문화

 그런데 이 시기에 넘어온 유이민 집단에는 한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는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위만입니다. 연나라 출신 위만이 큰 무리를 이끌고 도착했을 때 고조선은 준왕이 지배하고 있었어요. 이 시기에 고조선의 통치자는 왕이라는 칭호를 쓰며 전보다 강력해진 왕권을 누렸습니다. 어느덧 고조선은 초기 군장국가에서 다음 단계의 국가, 연맹왕국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군장들이 그들의 부족 세력을 통제했기 때문에 왕권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과도기적 단계의 국가 조직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 예로 고조선의 법률인 '8조법'을 들 수 있지요. 전해지는 조목은 3가지뿐이지만, 그 내용을 통해 국가 체계가 발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한다.

 2)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한다.

 3)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러나 50만 전을 배상하면 용서한다.

 

 고조선으로 이주한 위만은 준왕과 신뢰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그 결과 서쪽의 변방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그 구역 거주자들을 책임지고 이끄는 과정에서 위만은 점점 세력을 불렸어요. 마침내 기원전 194년, 위만은 수도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끌어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위 찬탈 후에도 조선이라는 국명이 계속 이어졌기에, 고조선의 명맥이 끊긴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만은 강점은 중국에서 가져온 철기 문물이었습니다. 강력한 철제 무기와 군사력으로 위만조선을 발전시켰어요. 또한 위만은 중국의 한과 남쪽에 있는 진의 중간에서 길을 막고 중개무역을 펼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력도 왕권도 강해졌지요. 그런데 이렇게 동북아에서 세력을 키워가는 고조선을 아니꼽게 보던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한나라입니다.

 

 4. 한나라의 견제와 고조선의 멸망

 한나라는 진나라에 이어 중국 역사상 2번째 통일 왕조를 이룩한 강대국입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어떻게 멸망시켰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한나라 내부 상황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래전부터 한나라에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흉노족이 툭하면 쳐들어와서 약탈을 일삼는 것이었어요. 흉노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걸쳐 북방 몽골고원 일대를 휩쓸고 다닌 유목 민족입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진시황조차 흉노족이라면 학을 뗄 정도였어요. 진시황이 만리장성 공사에 힘을 쏟은 것도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지요. 그러나 흉노족은 침략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유목 민족인 흉노에게 침략은 곧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떠돌아다니며 식량원과 물자를 확보해야 하는 그들에게, 황하강 일대의 풍족한 중원 지역은 군침 도는 보물창고와 같았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200년, 한고조 '유방'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대적인 흉노족 정벌을 시도했지만 크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흉노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었던지, 노선을 아예 뒤바꿉니다. 굶주린 흉노가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미리 조공을 갖다 바치기로 한 겁니다. 이런 처절한 유화정책이 수십 년 이어지던 중에 한무제가 즉위합니다. 한무제는 흉노족에 대해 다시 강경책을 펼치기로 마음먹었지만, 말 타고 들판을 휘젓는 무적의 기마민족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무제는 흉노에게 고통받던 또 다른 피해자, 월지국과 손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원전 139년, 장건을 월지국으로 보냈습니다. 장건은 중간에 흉노에게 붙잡혔다가 흉노족 부인에게서 아들까지 얻는 등 온갖 일을 겪고 무려 13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돌아온 장건은 월지국이 한나라와 손잡을 생각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보고했지요. 그러나 장건이 전해준 정보 중에는 한무제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흉노가 한나라 비단을 가져다 서역 상인에게 비싸게 팔고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그래서 한무제는 서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길을 뚫기로 합니다. 동서양이 만나는 거대한 실크로드가 개척된 것이지요. 돈줄이 막힌 흉노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역의 힘을 깨달은 한무제에게 고조선은 눈엣가시였습니다. 중개무역으로 무럭무럭 성장하며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던 고조선이 곱게 보일 리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합니다. 그러나 국력이 강한 고조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어요.

 오랜 싸움이 이어지던 중, 고조선의 지배층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항복하자는 의견과 계속 항전하자는 의견이 대립한 것입니다. 끝까지 싸우려 한 고조선의 우거왕은 결국 반대파의 손에 살해당했지만, 남은 세력은 항전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멸망했습니다. 이후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설치해서 직접 통치했어요. 한사군은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개의 행정구역인데, 이곳을 통해 중국 문물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한사군은 설치된 지 약30년 만에 3개의 군이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 있던 낙랑군은 4세기경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는 한반도의 정치 질서를 결정적으로 재편성했습니다. 이후 한반도 일대에는 새로운 나라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일부는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해서 한반도의 역사를 주도했지만, 다른 일부는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채 다른 국가에 흡수되거나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