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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 발해가 우리의 역사인 이유

by 열매와 꿈나무 2025. 8. 4.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668년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에겐 피눈물 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그토록 염원하던 고구려 정벌에 성공했지만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어요. 고구려 유민들이 끈질기게 저항하니 골치가 아팠죠. 반란을 일으킬 틈도 주기 싫었던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집단을 강제 이주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20만 이상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 거란과 같은 주변 민족들은 낯선 땅으로 줄줄이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대륙 곳곳의 광활한 황무지에 흩뿌려졌어요. 비참하고 배고프고 분했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의 부활을 염원했고, 그들의 중심에는 대조영이 있었습니다.

 당나라 관리의 가혹한 처벌과 세금 수탈이 이어지던 어느 날, 거란족장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말갈족장 걸사비우와 함께 사람들을 이끌고 당을 탈출했어요. 하지만 추격하는 당군과 싸우던 걸사비우가 죽고 걸걸중상도 병에 걸려 사망합니다.

 대조영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민들을 이끌었어요. 그들의 목적지는 오직 옛 고향 땅이 있는 동쪽이었습니다. 대조영의 무리는 천문령에서 당군을 기습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어요. 끈질기게 추격하던 당군을 시원하게 격파한 대조영은 마침내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 말갈족과 함께 새 나라를 세웠지요. 때는 698년, 고구려 멸망으로부터 딱 30년이 지난해였습니다.

 발해의 역사는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등한시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은 정치적 목적으로 펼치는 동북공정에 따라 발해를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지요. 의도적인 역사 왜곡에 대응하려면 발해가 우리나라의 역사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1. 발해,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다양한 형태로 증명됩니다. 발해가 일본이나 신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도 스스로 고(구)려라고 소개할 정도로,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분명히 밝혔어요. 발해의 왕족과 지배 계층도 고구려인이었습니다. 피지배계층인 말갈족은 고구려시대부터 주요 병력으로 활약하던 민족이었어요.

  또한 발해가 남긴 유물과 유적에서도 고구려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중국 지린성에 있는 발해 정혜공주의 무덤 양식은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이에요. 이름처럼 돌로 만든 방이 있는데, 돌방과 무덤 입구 사이에는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굴이 뚫려 있습니다.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양식이지만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구조라 벽화 빼곤 거의 남아 있는게 없습니다.

 발해의 2대 무왕은 그의 시호처럼 무력을 사용해 영토를 넓혀갑니다. 발해의 팽창에 주변 나라들은 촉각을 곤두세웠어요. 특히 흑수말갈과 당나라는 발해를 양옆에서 견제하기 위해 손을 잡았고, 무왕은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결국 732년, 무왕이 보낸 장군 장문휴가 당의 산둥 지역을 공격합니다. 그러자 당나라는 반격을 가하며 신라에게도 발해를 공격하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신라군은 혹독한 겨울 날씨와 폭설로 고생하다가 결국 성과 없이 철수했습니다. 당나라도 별 성과를 얻지 못했어요.

 동북아에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무왕은 주변의 거란, 돌궐과 힘을 합쳐 상황을 타개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어느덧 돌궐은 내부 분열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고 거란은 결국 당나라에 복속됩니다. 심지어 남쪽에선 신라가 발해를 위협하는 상황이었어요. 무왕은 살기 위해 당과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합니다.

 

 2. 왕권을 크게 강화한 문왕과 선왕

 무왕이 죽은 이후, 문왕의 시대에 발해의 분위기는 확 달라집니다. 시호에서 알 수 있듯 문왕은 문치주의를 표방한 왕이었어요. 주변 국가와의 힘겨루기 대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며 문화교류를 이어갔죠. 문황 대에는 당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이는 등 내부적으로 체계가 정비됩니다.

 문왕은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어요. 특히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를 운영하고자 교육에 힘썼지요. 백성의 마음을 통합하기 위해 불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당나라와 사이가 좋아지니 산둥반도에는 발해 사신들이 머무는 '발해관'이라는 숙수까지 생겼어요. 또한 신라로 통하는 교통로인 신라도를 만들어 교역했고, 일본으로도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구축합니다.

 재위하는 57년 동안 국력을 키우고 왕권을 강화한 문왕은 독자적인 연호 '대흥'을 사용하며 자신감을 표출합니다. 정효공주의 묘비를 통해 문왕이 황제로 불렸음을 알 수 있어요. 또한 일본에 보낸 국서에 자신을 천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발해는 강성했습니다.

 문왕이 다져놓은 기틀 위에서 발해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것은 9세기 선왕 대였습니다. 당나라가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 즉 해동성국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어요. 어떤 번영을 누렸기에 이토록 극찬받았을까요? 선왕 시대에 발해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선왕은 확장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방 행정 제도를 다시 정비했어요. 발해에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이 만들어집니다. 또한 발해는 국제교역을 위해 '발해 5도'를 터서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어요.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며 건설한 발해가 가장 빛나던 시기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10세기 초, 동아시아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한반도에서는 혼란의 후삼국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당나라는 멸망해 버렸어요. 그리고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란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입니다. 강력한 기마병으로 무장한 거란은 중원을 향해 입맛을 다시며 폭풍처럼 세력을 키웠어요.

 발해는 요동반도를 사이에 두고 거란과 혈투를 벌였고, 결국 926년, 야율아보기의 대대적인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229년간 존속한 동북아의 해동성국이 멸망한 것입니다. 한순간에 나라를 잃은 발해 유민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의 이야기는 뒤에서 이어가겠습니다. 남북국시대의 한 축을 이루던 발해가 사라진 이후, 국제 정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