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반도 최초의 통일을 이룬 통일신라(2)

by 열매와 꿈나무 2025. 8. 2.

 

 4. 삼각무역을 주도한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은 가운데 서해안에는 해적이 수시로 나타났습니다. 신라인을 납치해서 당나라에 노비로 팔아넘기고 약탈을 일삼았어요. 장보고는 본래 미천한 출신이라 신라의 골품제 사회에선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당나라로 넘어가 군인 신분으로 성공을 이뤘죠. 당나라는 중원 대륙의 역대 주인 중에서도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나라였어요. 이런 환경에서 장보고는 세상을 넓게 보는 안목을 키웠지요.

 828년에 신라로 귀국한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해적을 소탕하자고 건의합니다. 이에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징발하도록 허락하며 '청해진 대사'라는 벼슬도 내려줫어요. 장보고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합니다. 군사력을 갖춘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해적을 깨끗이 소탕하더니, 더 나아가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까지 주도하기 시작해요. 시대를 한참 앞서가며 성공을 일궈낸 장보고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어요.

 장보고가 해상왕으로 활약하는 동안 조정에서는 피비린내는 왕위 쟁탈전이 또 이어졌습니다. 귀족들은 장보고에게 군사지원을 받기도 했는데,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인물이 왕이 된 경우도 있어요.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 장보고는 골품제의 벽을 뚫고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이려는 꿈을 꿉니다. 하지만 결국 시대적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어요. 중앙 귀족은 장보고의 세력이 더이상 팽창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846년, 장보고는 중앙 귀족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합니다. 그 자객은 한때 장보고가 빋었던 부하였어요.

 장보고가 쏘아 올린 공으로 지방 각지에선 호족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호족'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집단을 뜻합니다. 모래성 같던 중앙정부의 힘이 와르르 무너진 것은 진성여왕 대였어요. 진성여왕은 삼촌인 위홍과 사랑에 빠져 정을 통했고, 위홍이 죽은 뒤에는 젋고 아름다운 남자들을 궁에 끌어들였다고 해요. 이러한 후대의 기록은 진성여왕을 음란한 이미지로 그려냈지만, 사실 골품제 사회에서 혈족간의 관계는 오늘날처럼 금기시되는 문제는 아니었어요. 왕이 후사를 위해 여러 이성과 관계를 맺는 것 또한 문제 될 것은 없었지요.

 진짜 문제는 여왕의 남자들이 요직을 꿰차고 앉아 국정을 도맡았다는 점이었습니다. 혜공왕 대부터 위태롭던 조정의 기강은 더욱 문락해졌어요. 나라가 어수선한 와중에 세금이 제대로 걷힐 리가 만무하지요. 나라의 창고가 텅텅 비자 귀족들은 가난한 농민들만 쥐어잤으며, 온 나라에 도적이 들끓었습니다. 악순환의 굴레가 이어지던 중에, 조정에서 보낸 관군은 원종과 애노의 난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어요. 이로써 신라의 중앙정부는 지방을 통제할 능력을 완전히 잃은 것입니다.

 

 5. 신라를 개혁하려는 최후의 몸부림

 이때 몰락하는 신라를 개혁하려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최치원입니다. 6두품 집안 출신인 최치원은 어릴 때부터 글을 빨리 익히며 학문에 두각을 드러냈어요. 하지만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벼슬엔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최치원의 아버지는 더 넓은 세상에서 재능을 펼치길 바라며 핏덩이 같은 12세짜리 아들을 당나라로 유학 보냅니다. 당나라에는 빈공과라는 외국인 전형 과거 시험이 있었거든요. 당나라로 떠나는 배를타기 전 최치원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10년 안에 과거 급제를 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최치원은 아버지의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뾰족한 가시로 살을 찔러가며 독하게 공부했어요. 마침내 6년 만에 빈공과에서 장원 급제해 벼슬까지 얻었지요.

 자신의 힘으로 출세한 최치원은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써서 명성을 떨치기도 합니다. 이 글에 얽힌 설화로 난을 일으킨 당사자인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러다 그는 884년에 조국으로 돌아와 894년 '시무십여조'를 올렸어요. 여기엔 신라가 당장 시행해야 할 조항이 적혀 있었죠. 이에 진성여왕은 기뻐하며 6두품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관등, 아찬을 내려줍니다.

 하지만 최치원의 꿈은 결국 중앙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어요. 시기 질투를 받던 최치원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바닷가를 떠돌며 시를 쓰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어요. 이렇게 신라는 나라를 뜯어고칠 기회를 영영 놓쳤습니다. 한국사의 마지막 여왕 진성여왕은 897년, 국정을 파탄 낸 책을 지고 스스로 하야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근년 이래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내가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

 

 삼국 통일의 빛바랜 영광을 뒤로한 채, 어느덧 한반도는 각지에서 지방 호족이 할거하는 후삼국시대로 접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