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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통일을 이룬 통일신라

by 열매와 꿈나무 2025. 7. 31.

 

 1. 나당 연합군, 삼국 통일을 이루다.

 나당 연합군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는데, 이때의 공으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바로 태종 무열왕입니다. 그동안 신라에선 오직 성골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었는데,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었습니다.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즉위한 뒤에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요.

 하지만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는 아직 중대한 숙제가 남아 있었어요. 애초에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미 백제와 신라 땅에 도독부를 설치해서 단나라 정복지 취급을 하고 있었지요. 이제 멸망한 고구려 땅에도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자 나당 연합은 산산조각이 나고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때 고구려 유민들은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부흥 운동을 벌였지만 끝내 실패했어요.

 7년간의 전쟁 끝에 결국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은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고,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 중 대동강 이남 지역만을 통합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인해 이전까지 각기 다른 나라로 분열돼 있던 한민족이 하난의 문화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점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은 한국사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신라는 더 넓은 땅과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됐어요.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평가받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영토가 이전보다 2배 이상 넓어지며 더 강력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게 됩니다. 681년에는 신문왕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통일 왕국의 출발점에 선 신문오아이 전성기의 기틀을 잘 다진 덕분에 앞으로 약 1세기간, 통일신라는 눔부신 번영을 이룩하게 됩니다.

 신문왕이 나라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잠재우는 신비한 피리를얻었다는, 일명 만파식적 설화도 유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 통일의 업적을 이룬 문무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며 동해 한가운데 있는 바위섬에 묻힙니다. 신문왕은 호국의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지어 소중히 모셨지요.

 어느 날 용이 된 문무왕이 나타나더니 신문왕에게 검은 대누무를 주었다고 해요. 그 대나무로 피리 만들어 불면 만 가지 파도와 같은 근심 걱정을 잠재운다고 하여 '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만파식적 설화를 통해 당대 신라 사람들이 태평성대를 바라던 마음을 엿볼 수 있어요. 실제로 신문왕은 수많은 업적을 남기며 나라를 안정시킨 왕으로 평가됩니다.

 

 2. 신라의 왕권을 강화한 신문왕

 신문왕은 왕이 되자마자 장인이었던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했어요. 반란을 진압했어요. 반란을 명분 삼아 즉위 초부터 정적들에게 피의 숙청을 가하며 매운맛을 보여줬지요. 또한 신라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국학을 세웠어요. 국학에서 유학 교육을 통해 국가와 국왕에 충성을 다하는 인재를 기를 수 있었죠.

 신문왕은 넓어진 국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9주 5 소경' 제도를 완성했어요. 통일 전부터 신라 수도였던 서라벌(경주)은 너무 아래쪽에 치우쳐 있었잖아요.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날의 충주, 청주, 원주, 남원, 김해 지역에 5개의 소경을 만들고 왕족이나 귀족을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중앙정부에서 지방을 직접 통제하면서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었어요.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의 힘을 누르는 작업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신문왕은 신하들에게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했어요. 녹읍은 수조권에 노동력 징발권까지 포함됐다면, 관료전은 수조권만 주는 제도였습니다. 여기서 수고권은 세금을 걷을 권리를 뜻합니다. 이때는 아직 화폐가 통용되기 전이라 신하들 월급을 돈 대신 수조권으로 주었지요. 이렇게 녹읍을 폐지한 것은 귀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하는 조치였습니다.

 

 4. 피 터지는 왕위 쟁탈전의 시작

 한편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합니다. 남쪽에서 삼한을 통일한 신라와 북쪽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공존한 7세기 후반에서 10세기 후반, 가끔 왜구가 쳐들어오긴 했지만 비교적 평화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경덕왕이 왕위에 오를 때쯤엔 귀족들의 누적된 불만이 조금씩 튀어나오고 있었어요.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했다는 것만 봐도 바로 눈치챌 수 있지요.

 귀족들이 꿈틀꿈틀하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경덕왕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왕권을 유지했어요. 무엇보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을 남긴 왕이에요. 예컨대 재상 김대성이 세운 석굴암과 경덕왕 때 짓기 시작해 혜공왕 때 완성한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지요.

 이렇게 눈부신 문화적 성취를 이룬 경덕왕은 왕위를 물려줄 자식이 없었어요. 그래서 왕비를 내쫓고 만월부인을 새로 들여서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들이 바로 36대 혜공왕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어린 아들이 신라 몰락의 아이콘이 되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8세짜리 왕과 태후 만월부인의 섭정 아래 귀족들의 반발은 점점 더 격렬해졌어요. 툭하면 반란이 터지고 주동자를 처형하길 반복하다가, 결국 혜공왕까지 살해당합니다. 이것이 본격적인 비극의 서막이었어요.

 혜공왕을 죽이고 37대 선덕왕이 즉위합니다.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126년 동안 모두 무열왕 계열이 쭉 왕위를 이었는데, 선덕왕은 내물왕의 후손이었어요. 귀족들 사이에선 묘한 분위기가 흘렀어요. 왕의 직계가 아니어도 왕이 될 수 있다면, 나도 왕이 될 수 있겠다는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피 터지는 왕위 쟁탈전이 시작됩니다. 150여 년 동안 20명이 넘는 왕이 즉위했다니 이때의 혼란스러움이 상상이 가나요?

 중앙에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며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지방에서는 각종 난이 일어납니다. 조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이 된 헌덕왕 때는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어요. 김헌창은 충남 공주지역에 위치한 웅천주의 장관인 도독이었어요. 그동안 별별 반란이 많았지만, 특히 김헌창의 난이 눈에 띄는 이유가 있습니다. 김헌창은 스케일이 남달랐거든요. 웅천주에서 새 나라를 세우더니 국호는 장안, 연호는 경운이라고 선포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관국에게 빠르게 진압되며 결국 김헌창은 마지막 순간 자결하고 말아요. 이렇게 각종 봉기와 난은 작은 실개천처럼 모여 역사의 물줄기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