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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의 시작,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백제(2)

by 열매와 꿈나무 2025. 7. 29.

 

 4. 망국의 쓸쓸함이 가득한 사비 시대

 백제의 두 번째 수도 웅진은 고구려에 떠밀려 옮겨 간 곳이었지만,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는 달랐습니다. 538년에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꿈꾸며 사비 천도를 강행했어요. 이번엔 철저한 계획하에 이뤄진 천도였지요. 오늘날의 부여 지역이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사비는 서해로 연결되는 백마강이 있어 교류하기 편리했어요. 남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있어 백성들이 살기에도 좋았지요.

 성왕은 한때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기도 합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뿌리가 부여 출신 주몽에게 있다는 것을, 백제 왕실은 북방의 강자였던 부여를 계승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강성한 백제의 부활을 꿈꾸며, 성왕은 정치나 행정제도도 대부분 개편합니다. 신도시를 건설하고 국호까지 바꾸던 성왕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성왕 때 백제는 한강 유역을 비록 잠시뿐이었지만 재탈환하기까지 했습니다. 551년에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결국 한강을 차지했던 고구려를 밀어낼 수 있었지요. 신라 진흥왕은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했고 백제 성왕은 거의 100년 만에 한성을 포함한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때는 6세기, 가장 뒤늦게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의 시대였습니다. 553년에는 한강 하류까지 신라가 차지하게 되지요. 성왕은 554년, 충북 옥천 지역에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온 힘을 다해 백제를 일으켜 세우려던 성왕의 죽음은 백제에 큰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백제와 신라는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5.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과 삼천궁녀

 혼란의 7세기가 열리고, 백제 30대 무왕이 등극합니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해서 새로운 백제시대를 열고자 했어요. 무왕의 꿈은 익산의 미륵사에 남아 있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문화유산이지요.

 이후 백제의 마지막 국왕, 31대 의자왕이 등극합니다. 의자왕의 이름 뒤에는 늘 삼천궁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합니다. 방탕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덤이지요. 하지만 사실 의자왕은 처음 15년간은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삼천궁녀의 전설도 후대에 부풀려진 이야기예요.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하기 5년 전까지 신라의 성 40여 개를 빼앗고 신라 서쪽을 방어하던 대야성을 함락하며 정복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을 맺습니다. 당나라의 13만 대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대군이 나당 연합군으로 백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당황한 백제 내부에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그러는 동안 김유신의 신라군이 황산벌로 향하니,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끄는 계백 장군이 백제를 지키기 위해 나섰습니다. 계백은 출정하기 전,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출발했다고 합니다. 계백은 무너지는 백제를 지키기 위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했던지, 백제군은 너무나 열세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초반에 4번 승리를 거두고 오히려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신라군의 사기를 다시 끌어올린 이들은 바로 청년 화랑이었어요. 신라 장군의 아들 중에는 '관창'이라는 화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독려에 힘을 내어 적진에 몸을 던진 관창은 백제군에 붙잡혔지요. 계백은 비록 적군이지만, 어린 소년의 용맹함에 탄복하여 차마 죽이지 못한 채 돌려보냅니다. 그러자 관창은 마치 목숨이 2개인 사람처럼 또다시 적진에 뛰어들었어요. 또다시 잡혔을 땐, 더 이상 관용은 없었지요. 관창의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더니, 조국을 지키겠다며 물불 안 가리는 화랑들의 기개에 불이 붙습니다. 각성한 신라군이 총공격을 퍼붓자 결국 백제는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고, 계백은 전쟁터에서 장렬히 전사했어요. 660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6. 검소하면서 화려한 백제 문화의 정수

 웅진과 사비는백제 고난의 시기와 망국의 슬픔을 담은 도시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웅진과 사비에서 발견된 문화유산은 오늘날 우리를 고대 백제와 연결해 주지요. 1993년에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굴됐습니다. 백제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예술혼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하지요. 중국의 향로인 박산로와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미감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말이지요.

 '검이불루 와이불치',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백제의 미학을 평가한 문장입니다.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아름다운 숨결은 한반도는 물론 일본에도 남게 되었어요.

 백제는 왜에 불교문화와 건축 기술, 천문이나 의학 등 여러학문까지 전수해 주었지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이라 불리는 아스카데라는 백제 장인들의 지도하에 세워졌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왜는 집이든 궁궐이든 나무껍질을 지붕에 덮는 방식으로 건축했는데, 백제의 최첨단 건축 기술이 이식된 것입니다. 백제의 영향으로 6~7세기 일본에서는 찬란한 아스카문화가 꽃피우게 되었어요. 백제의 건축 기술은 삼국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예컨대 신라 선덕여왕 때 세운 82미터짜리 거대한 '황룡사구 층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주변 9개국을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탑이었어요. 이 탑을 어떻게 세울지 신하들과 논의할 때도 백제가 언급됐습니다. 신라에는 그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세울 장인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결국 백제의 장인을 초청해 기술을 지원받아 건설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충남 공주와 부여에는 백제 역사 유적지구가 조성돼 있습니다. 백제의 대표적인 유산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지요. 찬란했던 백제 문화를 가까이서 느끼고 싶다면, 충남으로 백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