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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의 시작,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백제

by 열매와 꿈나무 2025. 7. 28.

 

 백제의 건국 설화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에서 출발합니다. 주몽이 졸본 지역에 도착해서 연상의 여인 소서노와 결혼하고 고구려를 건국했지요. 소서노에게는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어요. 한때 두 형제의 앞날은 창창하게만 느껴졌을 겁니다. 어머니 소서노는 고구려 건국의 주역이자 주몽의 든든한 조력자 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소서노의 머리 위에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나타난 거예요. 아빠 주몽이 있는 졸본으로 건너온 유리는 고구려 태자의 자리를 꿰찼어요. 위기를 느낀 소서노와 온조, 비류 형제는 짐을 싸 들고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해요.

 기원전 18년, 온조는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나라를 세웁니다. 비류는 인천 미추홀에 터를 잡았지만, 이곳은 땅도 습하고 물이 짜서 살기 불편했어요. 결국 비류의 세력은 온조에게 흡수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나라 이름이 십제였는데, 이후 백제로 고쳤다고 합니다.

 

 1. 백제의 눈부신 한성 시대

 처음엔 마한 지역의 소국이던 백제는 초기 연맹왕국 단계를 지나 고대국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3세기 고이왕은 항강 유역을 환전히 장악하며 두각을 드러냈어요. 특히 마한 지역 최강자였던 목지국까지 병합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귀족층으로 흡수된 족장 세력을 관리하기 위해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이왕 집권기에 '16관등제'와 '6좌평제'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이때 모든 체제를 완비했다기보단 여러 가지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고 이해하는 편이 일반적입니다. 예컨대 공무원의 등급을 16등급으로 체계화한 16관등제는 6세기 성왕 때 완성됐다고 보고요. 3세기의 고이왕은 지배 체제 정비를 시작해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유명한 근초고왕은 346년에 즉위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의 체격과 외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식견이 폭넓었다고 해요. 한반도의 중앙을 관통하는 한강. 이 유리한 지역을 처음부터 선점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맞이합니다. 근초고왕은 사방으로 대외 진출을 활발히 합니다. 마한 지역을 전부 병함했을 뿐 아니라 북쪽으로도 진출했어요. 근초고왕은 369년, 371년에 연달아 고구려를 물리친 뒤 결국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킵니다.

 372년에 근초고왕은 동진에게서 '진동장군 낙랑태수'로 책봉 받습니다. 국제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거지요. 근초고왕 이후로도 백제는 중국 남조의 왕조들과 계속해서 교류했습니다. 그런데 위쪽의 육로로 넘어가 북조의 교류하자니 고구려가 떡하니 막고 잇잖아요. 그래서 서해를 통해 남조 국가들과 활발히 교류하게 됩니다. 중국 대륙의 남조 국가들도 백제를 중개지로 삼아 한반도나 왜와 교류할 수 있었어요. 백제는 개방적인 국제 교류환경 속에서 독창적이고 화려한 백제만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어요.

 백제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립하고 지배 체제를 정비한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에게 역사서<서기>를 편찬하게 해서 왕실의 위엄을 드높였습니다. 4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왜로 '칠지도'를 보냈습니다. 칠지도는 총 7개의 가지가 달린 철검으로, 백제와 왜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고대국가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인 불교 수용, 백제에서는 언제 이뤄졌을까요? 백제는 384년 침류왕 때 불교를 공식으로 수용했습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에도 동진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한 외국인 승려가 동진에 파견됐던 사신을 따라서 백제에 들어오게 됩니다. 침류왕은 그 외국인 승려를 궁궐에 머물게 했는데, 그가 바로 인도 출신 승려 마라난타입니다.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또 백제로 머나먼 길을 건너온 마라난타는 부지런히 세상에 불교를 전파하고 다니던 사람이었어요.

 

 2. 점점 내리막길로 달리는 백제의 운명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등장으로 아쉽지만 백제의 전성기가 벌써 저물기 시작합니다.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의 압박에 맞서 직접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도 했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습니다.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며 백제를 압박했어요.

 427년에 고구려 장수왕은 남쪽을 노려보며 도읍을 국내성에 평양으로 옮깁니다.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고,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잡아야 했죠. 433년, 백제 비유왕은 신라 눌지왕과 '나제동맹'을 맺었어요. 하지만 백제에 불어닥친 위기의 바람은 그칠 줄을 몰랐죠.

 백제 개로왕은 472년, 중원 대륙의 강자인 북위에 편지를 보내서 같이 고구려를 때려눕히자고 설득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북위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어요. 나날이 덩치가 커지는 맹수 같은 고구려를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개로왕의 외교는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 일이 오히려 고구려 장수왕을 자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에 함락됩니다. 개로왕은 성을 빠져나와 탈출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수도를 뱃기고 국왕은 참수당했으니 백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지요. 약 500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이어온 한성 백제의 시대가 끝이 납니다.

 

 3. 위기의 백제, 웅진 시대를 열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폐허가 돼버린 한성을 뒤로하고 오늘날 충남 공주 지역까지 내려갑니다. 백제의 두 번째 수도, 웅진입니다. 한성을 뺏기고 고구려에 쫓겨 내려왔으니 나라 분위기가 얼마나 어수선했을까요. 당연히 왕권도 추락했겠지요.

 백제 귀족은 정권을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합니다. 대표적인 귀족 가문이 바로 진씨와 해씨 집안이었어요. 문주왕은 진씨의 견제에 자극받은 해구에 의해 피살당합니다. 아버지 개로왕이 참수당하고, 최악의 시기에 왕위를 이어받고, 웅진으로 부랴부랴 천도해 피살당하기까지. 이렇게 끔찍한 일이 문주왕 재위 3년 동안 연속해서 일어났어요.

 문주왕의 뒤를 이은 삼근왕은 15세 어린 나이로 죽고, 동성왕이 즉위합니다. 동성왕은 흔들리는 백제를 안정시켜보려고 노력했어요. 군력을 꽈 쥐고 있는 해씨, 진씨 가문이 아닌 새 귀족들을 등용하기도 했죠. 493년에는 신라의 소지왕과 혼인 동맹을 맺습니다. 신라와 더 끈끈한 관계를 맺고, 내부 귀족 세력의 손아귀에서 좀 벗어나 왕권 가오하도 꾀해볼 수 있었어요.

 이후 과거 강성했던 백제의 부활을 꿈군 왕들이 연이어 나타납니다. 백제 부흥의 아이콘, 무령왕과 성왕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팔척장신에 그림 같은 눈매를 가졌으며 성품이 너그러워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해요. 당시 웅진에서 백제인의 삶은 무척 피폐했어요. 자연재해와 전염병까지 창궐하니 모두 굶어 죽어갔어요. 무령왕은 가여운 백성을 위해 창고를 풀어주며 적극적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도 열심히 물리쳤어요.

 또한 국제 교류와 외교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의 무령왕이 잠든 무령왕릉이 당대 활발했던 문화 교류를 증명해줍니다. 예컨대 무령왕릉의 무덤 양식은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덥이며, 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되었어요. 무령왕을에서 출토된 4,600점의 유물은 고대 백제 문화의 우수함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