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전쟁에서 고초를 겪은 비운의 군주, 고국원왕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 때 고구려의 기세는 한풀 꺾이고 맙니다. 5호 16국 중에서도 특히 선비족 모용황이 세운 전연이 문제였지요. 전연이 342년에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기습 공격한 것입니다.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고구려를 구워삶기 위해 전연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어요. 북쪽 길은 넓고 평탄한데 남쪽 길은 좁고 험난 하니, 고구려가 북쪽 방어에 더 힘을 쏟으리라고 예상한 거였어요. 전연의 예상은 적중합니다. 고국원왕은 적들이 흔히 쳐들어오는 북쪽 길로 정예병 5만 명을 보내고 자신은 소수의 약한 병력을 이끌고 남쪽을 지키기로 해요. 하지만 전연이 예상 밖의 남쪽 길로 쳐들어오자 고국원왕은 무참히 패배했어요.
고구려는 또 다시 환도성을 침략당했습니다. 고국원왕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안심할 처지는 아니었어요. 전연이 5만여 명의 포로와 고국원왕의 어머니, 왕비까지 줄줄이 인질로 데려간 겁니다. 게다가 전연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체까지 싣고 돌아갔어요. 전연은 고구려를 압도적으로 꺾을 만큼 강력하진 않았으니, 최대한 고구려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려고 머리를 굴린 것입니다. 고국원왕은 입술을 꽉 깨물고 전연에게 저자세를 취한 끝에야 겨우겨우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국원왕의 굴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마침 4세기는 백제 근초고왕의 최전성기였고, 당시 고구려 왕은 평양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습니다. 백제 근초고왕이 가만 보니까 고구려 국왕의 가족들이 전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오는 등 상황이 안 좋아 보이는 것이, 백제에겐 기회가 될 것 같았어요.
백제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쪽에서 치고 올라갔고, 고국원왕은 371년에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합니다. 고구려 역사에서 국왕이 전사한 사례는 이때가 유일합니다. 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다니, 충격과 비통에 빠진 고구려는 이제 백제와 철천지원수가 됐습니다. 어찌나 화가 났던지, 나중에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백제의 국호를 오랑캐를 뜻하는 '백잔'이라고 새겨놓을 정도였어요.
한편 고구려에 치욕을 준 전연은 어떻게 됐을까요? 전연은 370년에 전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합니다. 적의 적은 어쩌면 나의 친구라 했던가요.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과 전연의 원수였던 고구려는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은 전진과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대대적인 내부 정비를 시작했어요.
즉위하자마자 부왕을 위한 복수혈전에 나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나라가 휘청거린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일단 내부적으로 지배층이 분열돼 있는 점이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수림왕은 불교를 공식 수용합니다. 불교는 기존에 제각기 따로 믿던 민간 신앙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불교의 체계적인 교리와 사상은 흩어진 민심과 분열된 지배층을 하나로 모으기에 적합했지요.
또한 국립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해서 유능한 인재를 키웠습니다. 연잉어 소수림왕은 왕의 통치를 받쳐줄 율령을 반포해서 통치 체계를 단단히 정비했어요. 소수림왕이 단행한 개혁은 고구려사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데, 이때 닦은 튼튼한 토대 덕에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을 힘차게 펼치며 5세기 고구려가 동북아의 맹주로 위용을 떨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5.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391년, 광개토대왕이 17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짧은 기간에 패권을 장악해나갔지요. 광개토대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 가장 먼저 백제로 돌진했습니다. 백제를 먼저 공격한 것은 한편으로 대륙으로 진출할 때 혹시 모를 후방 공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함이었지요. 광개토대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으며 결국 396년, 백제 아신왕을 무릎 꿇리고 한강 이북을 점령합니다. 백제와 한창 싸우는 와중에도 북쪽의 거란과 숙신까지 정벌했어요.
한편 호되게 당한 백제는 왜(일본)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400년에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자 광개토대왕은 5만 명의 군사를 지원해줬어요. 그 덕에 왜구를 물리치고 신라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 뒤에도 광개토대왕의 숨 가쁜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어요. 요동반도와 동부여까지, 고구려의 영역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팽창합니다.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지요.
이러한 고구려의 강력함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고구려군의 강점은 뛰어난 전략과 전술, 철갑 기병 그리고 우수한 무기 제조 기술에 있었습니다. 지리적 특성상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빠르게 외부의 무기 기술을 흡수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어요. 특히 고구려의 '맥궁'은 우수한 품질로 유명했는데, 탄력이 대단해서 적군의 갑옷을 쉽게 관통했습니다. 게다가 수렵으로 단련된 민족답게 고구려군은 달리는 말 위에서 뒤돌아 적에게 활을 쏘기도 했어요.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고구려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화려한 전성기를 이끌다가 39세에 짧고 굵은 생을 마칩니다.
고구려 전성기의 모습은 광개토대왕의 연호 사용에서도 드러납니다. 광개토대왕은 한국사 최초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어요. 연호를 사용해 그 시대를 정의한다는 것은 굉장한 권위와 자신감의 상징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연호를 통해 고구려의 강력한 국가적 자부심과 함께, 본인이 시대를 주도하는 시간의 지배자임을 보여주었어요.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은 그 뒤를 이은 장수왕에 의해 계속됩니다. 장수왕의 시호는 말 그대로 98세까지 장수했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오래 살고 재위 기간이 길수록 업적도 풍부해지기 마련이지요. 장수왕은 무려 78년의 재위 기간에 걸쳐 고구려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로 414년에는 부왕의 업적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습니다. 고구려의 국력과 자부심이 정점을 찍었던 시기, 중국 집안 지역에 우뚝 세워진 거대한 비석은 무려 6미터가 넘습니다.
그리고 427년에 장수왕은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어요. 한나라 수도를 옮기는 일은 오늘날에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특히 고대국가에서는 더더욱 중대하고 예민한 일이었어요. 당대 지배계급에겐 수도에 모여 사는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모든 운영 시스템이 수도를 중심으로 조직 되어 있었지요. 지난 400년간 대대손손 국내성에서 세력을 잡은 기존 귀족들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하지만 장수왕은 그 어려운 천도를 실행했습니다. 그만큼 국왕의 권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북쪽을 정리해줬으니, 이제 아들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추진할 차례입니다. 고구려 장수왕이 남쪽으로 쭉쭉 밀고 내려오자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결성했어요. 그러나 파죽지세인 고구려를 막지 못했고 475년, 장수왕은 결국 백제의 오랜 도읍인 한성을 차지했습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고구려는 5세기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을 죽이며 고국원왕의 복수를 마무리하고, 금강 유역까지 고구려 최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세워진 충주 고구려비는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서 당시 장수왕의 진출 지역을 알려줍니다.
5세기에 고구려가 전성기를 이룩한 배경에는 국제 정세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분열된 남북조가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고구려에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거지요. 장수왕은 상황에 따라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펼치며 국내의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결국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