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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중세를 연 고려, 500년 고려왕조의 출발(3)

by 열매와 꿈나무 2025. 8. 7.

 

 3. 고려 왕실에서 벌어진 기막힌 사랑과 배신

 한편 고려 왕실에서는 초기부터 혈족 간의 결혼, 즉 근친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금기시되는 일이지만, 당시엔 이런 관습이 특별히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어요. 시대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전통과 관습이 변하듯, 근친혼 또한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려  왕실의 근친혼은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었어요. 왕실 내부에서 근친혼을 반복하면 권력의 외부 분산도 막을 수 있고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도 강화할 수 있었지요. 이러한 관행은 광종 때부터 본경화되어 현종 때까지 지속됐어요. 그래서 이 시기 주요 인물 간의 관계는 굉장히 복잡하게 얽힙니다.

 고려의 태평성대를 여는 8대 국왕, 현종의 즉위까지 드라마 보다 극적인 역사가 전개됐어요. 이 이야기는 6대 성종의 두 여동생에서 시작됩니다. 두 여동생의 정체는 헌정왕후와 훗날 천추태후로 불리는 헌애왕후입니다. 헌정왕후와 헌애왕후 두 자매는 5대 왕 경종의 왕후들이었어요. 경종이 27세 젊은 나이로 죽자, 헌정왕후는 본인 집으로 돌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근처에 살던 왕욱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갖게 되었어요. 문제는 왕욱이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헌정왕후의 삼촌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근친혼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고 해도, 혼인도 하지 않은 삼촌과 조카가 정을 통했다는 것은 당시에도 선을 한참 넘은 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경남 사천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서러워 엉엉 울던 헌정왕후는 대문 앞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부여잡고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뒀어요. 이 아이가 바로 훗날 고려 왕 현종으로 즉위하는 대량원군입니다.

 시간이 흘러 6대 성종이 죽고 7대 목종이 18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목종의 어머니는 5대 경종의 다른 부인이자 헌정왕후의 언니인 헌애왕후였어요. 아들 목종을 왕위에 올린 헌애왕후는 아들 대신 섭정하며 전권을 장악했습니다. 천추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그녀를 사람은 '천추태후'라고 불렀어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천추태후는 죽은 동생이 낳은 대량원군의 존재가 늘 눈에 거슬렸어요. 마지막 남은 태조 왕건의 손자인 대량원군은 명실상부한 왕위 계승 1순위였지요. 천추태후가 원하는 목종의 후계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천추태후는 불륜 관계였던 외척 김치양과 아들을 또 낳았거든요. 어차피 목종은 미모의 동성 연인 유행간과 남색을 즐기느라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었습니다. 결국 조카를 극도로 경계한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의 머리를 강제로 빡빡 밀고 승려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산에 있는 신혈사에서 지내던 대량원군은 천추태후의 끊임없는 독살 시도를 피해 불안과 긴장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1009년, 목종의 병세가 갑자기 심각해집니다. 목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리 어머니가 낳은 동생이라 해도, 그는 왕씨가 아니라 김 씨 핏줄이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남은 용손인 대량원군이 왕위를 이어야 마땅하다고 여겼지요. 이제 사태가 긴박하게 흘러갑니다. 목종은 천추태후의 서슬 퍼런 눈길을 피해 어서 대량원군을 안전히 궁궐로 모셔 오도록 했어요. 또한 서북쪽 지역에 있던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 자신을 호위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계획이 이상하게 틀어지기 시작했어요. 개경으로 열심히 달려오던 강조가 중간에 잘못된 정보를 입수해 목종이 이미 승하했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이미 김치양이 정권을 잡았다고 착각한 강조가 개경의 궁궐로 쳐들어가다가, 뒤늦게 목종이 멀쩡히 살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강조는 이판사판으로 정변을 진행해서 목종을 폐위시켰어요. 김치양과 그의 아들은 곧장 살해당했고, 목종도 쫓겨나던 길에 시해됩니다. 한바탕 궁궐을 뒤집은 강조는 대량원군을 옹립하겠다며 어서 신혈사로 가서 모셔 오라고 명했습니다. 이미 목종이 대량원군을 후계로 정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결국 신혈사의 대량원군 앞에는 목종과 강조가 각각 보낸 사자가 도착했지요. 강조의 오해로 일이 좀 복잡해졌지만, 어쨌든 대량원군은 모두의 바람 속에서 고려 8대 국왕, 현종으로 즉위합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은 거란의 황제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