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의 전환기를 만든 피의 군주 광종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은 끝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툭하면 침소로 몰래 들어오는 자객들 때문에 마음이 늘 불안했어요. 혜종의 어머니가 미천한 출신이라는 점이 그의 약점이 되었고, 이복형제들과 배후의 강력한 호족 세력은 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혜종이 얼마나 조롱받았는지, <고려사>에는 그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있어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요. 재위 2년 4개월 동안 주름살을 펼 틈도 없이 주위를 경계해야 했던 혜종은 34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혜종이 죽자 바로 아래 동생인 왕요가 3대 임금인 정종으로 즉위했어요. 젊고 혈기 왕성한 정종은 방해되는 인물을 거침없이 숙청했습니다. 혜종을 끝까지 지키던 박술희와 혜종의 장인 왕규가 목숨을 잃었지요. 하지만 아직 왕권이 굳건하지 않아 개경의 호족들은 왕명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습니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정종 역시 4년의 짧은 재위를 끝으로 생을 마감했어요.
4대 임금 광종은 고려에 중대한전환기를 가져왔습니다. '피의 군주'로 유명하지만, 광종이 즉위 초부터 피바람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어요. 초반에 광종은 <정관정요>를 열심히 읽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정관의 치'라는 찬사를 받은 당나라 태종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정치 문답을 담고 있지요. 이 책을 읽으며 광종은 아마도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고민했을 거예요. 그러나 점차 광종은 강력한 왕권 확립을 위해 결단을 내릴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폭풍 같은 개혁 정책을 단행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은 위풍당당하게 권세를 휘두르는 호족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광종은 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해서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들은 양민으로 해방해 주었어요. 당시에는 이렇게 억울한 노비가 많았습니다. 원래 양민이었던 이들도 난세에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팔아야 했던 거지요. 노비안검법은 얼핏 백성을 위한 정책 같지만, 실제론 호족의 힘을 꺾는 방법이었습니다. 호족들이 소유한 노비는 든든한 경제적·군사적 자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비들은 호족을 위해 농사도 짓고 집안일도 해주고 필요시 사병으로 동원될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이런 중요한 재산을 빼앗기자 호족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노비 해방은 여러 가지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일단 호족의 기반이 약해졌고, 세금 내는 양민이 늘어난 만큼 국가 재정에도 도움이 되었어요.
또한 광종은 957년에 과거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를 건의한 인물은 후주에서 영입한 쌍기였어요. 능력 있는 인재라면 외국인도 서슴지 않고 고위직에 등용했다니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놀라운 일이지요. 이렇게 광종이 추구한 인재 등용 방식은 고려의 개방적인 특성을 잘 보여주지요. 시험을 통해 관직을 주겠다니, 핏줄로 관직을 꿰차는 게 당연했던 호족들은 날벼락을 맞은 듯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959년에는 공복을 제정했습니다. 이제 관료들의 서열이 체계화되었고, 각각의 서열이 복장 색상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었어요. 무엇보다도 그 서열의 최정점에는 국왕이 있음이 가시화됐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광종은 개경을 '황도'라고 부르고, '준풍'이라는 새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황도는 곧 황제가 사는 도성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독자적인 연대 계산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고려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조치였습니다. 말년에는 위협이 될만한 세력을 매섭게 숙청하며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는데, 그 대상은 호족뿐 아니라 왕실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결국 혜종과 정종의 아들도 목숨을 잃었지요. 이렇듯 광종은 호족의 입김에 휘둘리던 왕실의 과거를 청산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광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경종의 사촌 동생 성종이 981년 왕위에 올랐어요. 조선의 성종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성종 역시 건국 초의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하여 붙은 묘호입니다. 광종이 왕권을 강화한 이후로 살벌했던 왕위 쟁탈전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어요. 그 기반 위에서 성종 대에는 정치적 방향성이 잡히고 고려의 여러 제도가 자리 잡았어요.
성종은 신하들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법을 적어 내라 명했고, 그중 최승로가 올리 '시무 28조'가 채택됐어요. 여기에는 불교의 폐단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과 민생 문제, 외교와 사회제도, 군주가 지켜야 할 덕목 등이 담겼습니다. 시무 28조는 성종의 국가 체제 정비에 지대하게 공헌했어요. 특히 성종은 2성 6부제로 중앙관제를 정비했고, 지방 주요 지역에는 12목을 설치했습니다. 각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까지 미치게 되었지요. 무엇보다도 최승로는 유교 정치의 주요 성을 강조했어요. 이에 공감한 성종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 교육제도도 정비했습니다. 그래서 성종을 유교 군주로 평가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