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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중세를 연 고려, 500년 고려왕조의 출발(1)

by 열매와 꿈나무 2025. 8. 6.

 

 한반도의 중세를 화려하게 수놓은 고려왕조는 약 500년의 긴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고려시대를 쉽게 이해하려면 시기별 지배세력을 기억하며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유용합니다. 먼저 각 시기를 주도한 지배 세력부터 살펴볼까요?

 고려의 막을 올린 첫 지배 세력은 호족과 6두품이었습니다. 앞서 왕건과 손을 잡고 고려를 세운 호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6두품 세력은 어떻게 초기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을까요? 신라의 골품제에서 성골과 진골 다음의 귀족 신분이 바로 6두품입니다. 예전에 통일신라에 흡수된 소국의 지배층 대부분이 6두품 신분을 얻었지요. 신라 말, 진골끼리의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 소외돈 6두품은 신라를 '손절'하고 새 나라 고려의 건국에 열정적으로 힘을 보탰습니다.

 이렇게 고려 건국 공신들은 정부의 요직을 맡으며 중앙 정계에 당당히 진출했고 신생국 고려를 적극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한번 얻은 기득권은 쉽게 놓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들은 권력과 경제력을 대대손손 안전하게 물려주었는데. 이것을 가능케 한 방법이 바로 음서제와 공음전이었어요. 이렇게 세대를 거쳐 공고해진 특권층은 하나의 강력한 무리를 형성하기 시작했어요. 대대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유력 가문(문)이 무리(벌)를 이뤘다고 하여, 이들을 '문벌'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고려의 두 번째 시기인 문벌 귀족 지배기는 고려 중기에 해당합니다. 고려는 끊임없이 외세 침략에 시달렸는데, 이 시기에는 거란이 쳐들어와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어요. 또한 문벌 귀족이 모든 혜택을 독점하면서 사회적 모순이 누적됐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벌어지며 나라가 시끄러웠죠.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문벌 귀족은 특권을 놓지 않고 더욱 꽉 움켜쥐려 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폭발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어요.

 고려의 세 번째 시기로 구분되는 무신 집권기는 그야말로 난세였습니다. 죽고 죽이는 피의 배신이 이어졌고 임금은 무신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어요. 그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몽골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이 등장해 세계사에 길이 남을 대원정을 시작했습니다. 고려 역시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세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대원으로 바꾸면서 중원 대륙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고려는 원나라의 사위, 즉 부마국이 되었어요. 원나라의 지배하에 고려 후기에는 친원파 '권문세족'이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지배층의 교체를 기억해 두고, 고려왕조를 활짝 연 태조 왕건부터 차례로 만나보겠습니다.

 

 1. 건국의 주역 호족 세력과 태조 왕건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역량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각 지방을 꽉 잡고 있던 호족들의 협조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었지요. 호족들은 언제든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태조는 확실하게 호족을 내 편으로 만들어 왕권을 안정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다양한 호족 융합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그중 대표적인 것이 혼인 정책과 사성 정책입니다. 태조는 호족들의 딸과 혼인해서 총 29명의 부인을 두었어요. 또 한 호족들에게 자신의 성 왕씨를 하사하는 사성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렇게 유력 호족들은 태조와 끈끈한 가족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태조는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이라는 많은 자녀를 두게 되었고, 이는 태조가 죽은 뒤에 펼쳐질 피 튀기는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태조가 호족에게 당근만 준 것은 아니었어요. 적절한 '밀당'을 하며 균형을 잡았지요. 태조의 대표적인 호족 견제 정책은 기인제도와 사심관 제도입니다. 기인제도는 호족의 자녀를 수도개경에 데려와 머물게 한 조치였어요. 교육받은 호족의 자녀 중 유능한 인물은 중앙관청에서 일하게 해줬는데, 유사시에는 인질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로써 지방의 유력 호족들은 아들이 일하는 중앙정부에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충성하게 됩니다.

 또한 고위 곤리를 출신 지역 사심관으로 임명해서 지방을 통제하고자 했어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 최초의 사심관입니다. 경순왕 김부는 고려에 항복한 이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었어요. 태조가 시행한 이 모든 제도는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로 끌어오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또한 숭불 정책으로 민심을 모으고, 가난한 백성을 위해 흑창이라는 빈민구제기관을 만들어 곡식을 나눠 주었어요.

 무엇보다도 태조 왕건이 가장 중요시한 대업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926년에 해동성국 발해가 거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자 태조는 나라를 잃은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주었어요. 그리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는 금수의 나라라며 대놓고 선을 그었어요. 또한 옛 신라인과 후백제인에게는 집과 땅을 나눠 주었지요. 이렇게 태조는 북쪽 발해 유민과 후백제, 신라 백성 모두를 끌어안으며 외세 영향 없이 통일을 이뤄냈습니다. 이것이 신라의 삼국 통일과 구별되는 점입니다.

 또한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땅을 넓히며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평생 그의 곁을 지킨 박술희를 불러서 왕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훈요십조를 남겼습니다. 태조 왕건의 이상과 업적을 후대 왕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었어요. 앞으로 고려는 창건자인 태조 왕건의 뿌리를 본받아 해상무역을 장려하고 해외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개방적인 해양 국가로 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