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국사의 중세를 연 고려, 후삼국시대로 다시 분열되다(1)

by 열매와 꿈나무 2025. 8. 5.

 

 사회 문제가 누적되던 통일신라 말,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습니다. 지배층의 과도한 수탈이 이어지자 결국 농민들의 울분이 폭발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처지에 내몰린 농민들은 목숨을 걸고 봉기하기 시작했어요.

 전국 각지에서 이들을 이끄는 유력자들이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독자적인 군사력과 행정조직까지 갖추며 세력을 키워가던 이 지방 세력을 '호족'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호족 세력 중 특히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하급 군인 출신 '견훤'과 승려 출신 '궁예'였습니다.

 

 1.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한 가설에 따르면 사실 궁예는 승려이기 전에 신라의 왕족이었어요. 높은 신분을 타고났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운했습니다. 궁예의 생년월일에는 오라는 글자가 두 번이나 포함되어 있는데, 어른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어요. 이런 날짜에 태어난 아이는 훗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의심한 것입니다. 게다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이가 자라 있었던 점도 수상쩍게 여겼어요.

 결국 신라 왕은 궁예를 살해하라고 명했습니다. 어린 궁예는 높은 곳에서 내던져져 죽을 위험에 처했으나, 다행히도 유모가 떨어지는 궁예를 받아 목숨을 구했지요. 이 과정에서 유모가 궁예의 눈을 잘못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궁예는 유모의 품을 떠나 승려의 길을 걸었어요. 하지만 그는 절망을 원동력 삼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의와 영웅적 자질을 키워나갔어요.

 시간이 흘러 궁예는 대표적인 호족 중 한 명인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다시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세를 불리던 궁예는 결국 양길의 뒤통수를 치고 독립해 한반도 중부 패권을 장악했어요.

 이 시기 하급 군인 출신 견훤은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한반도 서남부를 공략하며 덩치를 불렸습니다. 급기야 그는 스스로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어요. 견훤이 900년에 완산주(전주)를 도읍 삼아 건설한 나라가 바로 후백제입니다. 당시에는 국호를 백제라 했지만 먼저 있던 백제와의 구분을 위해 후백제라고 부르는 거지요. 이에 질세라 궁예는 901년에 후고구려를 세웠어요. 후고구려 역시 후대에 붙인 이름이고 당시에는 국호를 고려라 했지요. 이렇게 한반도가 다시 세 조각으로 찢어지면서 한국판 전국시대, '후삼국시대'로 진입했습니다. 후삼국시대는 후백제가 세워진 900부터 후삼국이 통일되는 936년까지 36년간 이어집니다.

 하지만 후삼국시대를 재통일한 영웅은 견훤도, 궁예도 아니었어요. 고려 건국의 주인공 왕건은 877년 송악(개성)에서 태어났씁니다. 왕건의 집안은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은 송악의 유력 호족이었어요.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세력을 뻗쳐오는 궁예에게 운명을 걸기로 결심합니다. 896년, 궁예에게 송악을 바친 왕륭은 태수가 되고, 당시 20세인 왕건 송악의 성주가 되었어요.

 이후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서 승승장구하며 수많은 전공을 세웁니다. 특히 왕건이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사건이 바로 나주전투입니다. 해전에 강했던 왕건은 서해를 지나 후백제 후방에 있던 금성을 점령한 뒤, 지명을 나주로 고쳤습니다. 왕건이 승리한 나주 전투는 후삼국 전쟁의 명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후고구려의 가장 큰 라이벌 후백제의 배후를 차지함으로써 후백제를 앞뒤로 압박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왕건은 뛰어난 전술로 견훤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습니다.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이듬해에는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911년에는 거대한 포부를 담아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죠. 궁예에게 공을 인정받은 왕건은 913년에 최고의 벼슬 '시중'에 올랐습니다. 이제 명실상부한 후고구려의 이인자가 된 왕건은 겸손한 리더십과 시원시원한 일 처리로 모두에게 존경받았습니다.

 반면 궁예는 점점 난폭해졌습니다. 자신을 살아 있는 부처, 미륵불이라 칭하던 궁예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을 내세워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어요. 독보적 권력의 일인자 자리가 불안했는지, 궁예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어요. 누구든 궁예의 관심법에 걸려들면 뜨겁게 달군 철퇴에 맞아 개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심지어 궁예는 자신의 처자식에게도 무자비했어요. 어느 날은 왕비 강 씨가 간통하는 것을 신통력으로 다 보았다며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아내를 치욕스럽게 죽였고, 두 아들까지 살해했습니다.

 그 의심의 덫은 곧 이인자 왕건에게도 덮쳤습니다. 궁예가 왕건을 대뜸 불러 네가 어젯밤 반역을 도모한 사실을 관심법으로 다 보았다고 추궁합니다. 왕건은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여기서 대뜸 아니라고 말한다면, 궁예의 신통력을 대놓고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궁예가 잠시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있을 때, 최응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줍는 척하며 왕건에게 속삭였어요. 궁예 말을 인정하고 사죄하면 목숨을 건질 거라는 다급한 충고였어요. 그 순간 궁예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깨달은 왕건은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었습니다. 왕건의 목숨이 달린 긴장되는 순간, 뜻밖에도 궁예가 만족스럽다는 듯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했어요. "경은 과연 정직하도다."

 나날이 폭정과 살육을 일삼던 궁예는 점차 민심을 잃어갔어요. 결국 기병 장군 홍유와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ㅈ어변을 일으키자고 은밀히 제안했어요. 왕건은 처음엔 펄쩍 뛰며 거절했지만, 이 대화를 들은 부인 유씨까지 거들자 결국 마음을 굳혔습니다. 의지를 다진 왕건은 갑옷을 입고 그를 따르는 장수들과 함께 진군했습니다. 깜짝 놀란 궁예는 뒷문으로 도망쳤지만, 이름 모를 백성에게 살해당해 파란만장한 삶을 허무하게 마감했습니다.

 이로써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이 철원에서 새 왕조를 건설합니다. 국호는 고구려를 계승하는 뜻에서 고려로 정했지요. 고려의 1대 임금 왕건은 이듬해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 즉 개경으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는 한반도의 운명을 건 패권 전쟁에 돌입합니다.

 

 2. 후삼국시대 통일을 위한 치열했던 패권 다툼

 호랑이 같은 견훤의 후백제는 경주 일대로 세력권이 쪼그라든 신라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견훤의 시야에서, 왕건은 건국한 직후라 내부를 안정시키기 바빠 보였고, 신라는 독 안에든 쥐처럼 보였습니다. 신라를 집중 공략하던 견훤은 920년에 대야성을 무너뜨렸고, 다급해진 신라의 요청에 고려가 구원병을 보냈습니다. 이로써 고려와 후백제는 불편한 사이가 되었어요.

 924년부터 이듬해까지 후백제가 두 차례에 걸쳐 고려의 조물성을 공격합니다. 시원하게 결판이 나지 않은 조물성 2차 전투에서 양국은 결국 인질을 주고받으며 화친을 맺기로 해요. 이때 왕건의 산촌 동생 왕신이 후백제에 인질로 잡혔고, 견훤의 조카 진호가 고려에 넘겨집니다. 그런데 1년도 안 돼서 고려에 넘겨진 진호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어요. 견훤은 고려가 인질을 죽였다고 생각해 고려의 인질인 왕신을 죽였습니다.

 견훤과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각자의 방식대로 달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의 방식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견훤은 힘의 논리를 앞세운 반면, 왕건은 모두를 품는 방식을 취했습니다.이 두 사람의 차이가 한눈에 보이는 사건이 있었어요. 927년에 견훤은 신라 수도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농락한 뒤 강제로 자결시키고, 왕비를 겁탈해서 신라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겼어요. 본래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이 신라의 국왕을 능멸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은 민심을 싸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견훤은 신라 왕족인 김부를 꼭두각시 왕으로 앉혔는데, 그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입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왕건은 즉시 5,0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은 공산 근처에서 견훤의 후백제군과 맞닥뜨렸어요. 이 전투가 바로 왕건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긴 927년의 '공산 전투'입니다. 고려군은 결국 후백제군에 포위되고, 왕건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습니다. 그러자 신숭겸이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어요.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고려의 왕인 줄 알고 그의 목을 베어 갔지요. 장군들의 충절 덕분에 왕건은 겨우 살아서 송악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 함께 유인작선을 펼치다 전사한 8명의 장수를 기리는 뜻에서 대구에 위치한 팔공산의 이름이 유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