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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 가야

by 열매와 꿈나무 2025. 8. 3.

 

 고대 한반도의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도 독립된 세력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철의 왕국이라 불리는 베일 속의 나라, 가야입니다. 가야는 10여 개의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왕국인데, 삼국과 달리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해 인지도가 낮고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요.

 그러나 가야는 오랜 기간 삼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외국과도 활발히 교류했고, 그들만의 독창적인 문화도 창조했습니다. 대개 임나일본부설 논란으로만 얽히며 이방인 취급받아온 가야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만나볼까요?

 

 1. 가야의 건국 설화

 한반도 남부 변한 지역에는 구지봉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9개 마을의 우두머리가 구지봉으로 모였더니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 왕을 만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이 노래가 가야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구지가입니다. 모두가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자 하늘에서 금으로 만든 상자가 내려왔어요. 상자 속에 있던 황금알 6개에서 각각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중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가 김수로입니다. 김수로는 금관가야의 왕이 되어 나머지 소국들을 이끌었어요.

 가야의 건국 설화를 통해 가야는 이주 세력과 김해 토착 세력이 함께 세운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변한 사회의 토착민이던 9개의 세력이 6명의 유이민을 받들어 6개의 소국, 가야를 이룬 것이지요. 가야의 역사는 크게 전기 가야연맹과 후기 가야연맹으로 나눕니다. 전기 가야연맹을 주도한 것은 금관가야이고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한 것은 대가야였어요.

 약 500년간 한반도 남부에서 존속한 가야는 철의 강국이었습니다. 변한 때부터 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귀한 철 자원이 선물처럼 깔려 있었어요. 가야의 가장 큰 성장 동력은 철기였고 가야인은 철제 도구 제작의 고수였습니다. 우수한 철제 농기구는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려주었습니다.

 게다가 철제 무기와 투구, 철갑옷과 같은 가야의 유물을 보면 전장에 나서는 용맹한 가야 전사들이 눈앞에 그려질 듯합니다. 가야에서는 주로 얇고 길게 가공한 철판을 이어 붙인 판갑옷을 제작했어요. 게다가 철기 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말 갑옷까지 만들었습니다. 철제 갑옷을 자칫 무겁게 만들었다간 실전에서 입어보지도 못하고 무용지물이 됐을 겁니다. 그만큼 가야의 기술력이 굉장히 좋았다고 볼 수 있지요.

 흥미로운 점은 가야에 여전사가 있었다는 점이에요. 김해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에서 20~30대로 추정되는 여성의 뼈가 발견됐는데 튼튼한 다리근육의 소유자였어요. 이들은 철갑옷과 철제투구로 무장한 가야의 여전사들이었습니다. 고대 한반도 남부를 누비던 여전사라니, 철의 왕국다운 흔적이지요. 가야의 철제도구는 주변 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가야는 남해안과 맞닿아 있어서 주변국과 물길을 통해 교류하기도 좋았어요.

 

 2. 가야의 성장과 활발한 국제 교류의 시작

 활발한 국제 교류로 성장한 전기 가야시대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가야에 큰 타격이 된 사건이 바로 낙랑군과 대방군의 소멸이었습니다.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하고 314년에는 대방군까지 멸망시켰지요. 낙랑군과 대방군이 가야의 큰 교역 상대였던 만큼 가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요. 상황이 달라졌으니 국제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4세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한 백제가 고구려 고국원왕까지 전사시키며 한반도의 패권 싸움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가야 역시 생존을 위해 새로운 국제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어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야는 왜와 함께 백제 라인에 줄을 섭니다. 하지만 이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요. 4세기 후기로 달려 갈수록 대세는 고구려로 넘어갑니다.

 백제는 신라를 먼저 공략한 뒤 고구려를 치기로 결심했어요.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죠. 때는 400년,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5만 기병을 보내 신라를 도와주니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괴멸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타격을 심하게 입은 금관가야는 더 이상 소국들을 이끌 힘이 없었어요. 구심점을 잃은 가야 소국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1세기부터 이어진 전기 가야시대가 저문 것입니다.

 한편 파란만장했던 4세기에 왜가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한 사실이 왜곡되고 부풀려져 임나일본부설의 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야에 대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던 논란이지요.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는 가야를 지칭합니다. 4~6세기 고대 일본이 '임나' 지역에 '일본부'라는 통치기구를 설치해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주장이에요.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 것은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릉비문, 칠지도 등이 있어요.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당시 국제관계를 봐도 오히려 문화 수준이 높은 백제가 일본에 한자, 유교, 불교, 건축, 미술과 같은 각종 문화를 전파해주면서 고대 일본 문화가 발전했지요. 더구나 한반도 남부를 200년이나 식민 통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토록 중대한 내용이 한국, 중국 역사서에 단 한마디 언급이라도 있었을 겁니다. 뜨거운 논란과 함께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공동연구가 이루어졌어요. 2010년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에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3.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중심이 이동한 후기 가야연맹

 한동안 침체기였던 가야 문화권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대가야였습니다. 고령의 대가야는 5세기부터 6세기까지 후기 가야연맹을 이끄는 주축이었어요. 당시 중원 대륙에는 남북조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5세기 후반에 가야는 남조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 본국왕'이라는 작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야는 백제, 신라와 함께 힘을 합쳐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온 고구려군을 물리치기도 했어요.

 그러다 554년, 관산성 전투가 벌어집니다. 백제와 신라 역사의 분수령이 된 이 전투 이후로 가야는 수명을 다해갔어요.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에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가야의 여러소국은 여전히 하나의 강력한 세력으로 통일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멸망도 점진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가야의 소국들은 이미 하나둘씩 각자의 판단에 따라 신라에 흡수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562년,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를 멸망시키면서 가야의 모든 역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한편으로 가야는 멸망 후에도 역사 속에서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날까지 한국 고유의 전통 현악기를 대표하는 가야금은 가야가 남긴 소중한 유산입니다. 신라에 전승되니 가야금의 선율은 궁중음악으로 발전했어요.

 또한 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라의 역사를 주도하게 됩니다. 삼국 통일이라는 거대한 업적을 이룬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도 가야의 왕족 출신이지요. 가야 연맹은 비록 고대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통해 신라를 비롯한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