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1,000년간 영화를 누린 고대국가 신라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였던 사로국에서 시작됩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여섯 촌장의 추대를 받아서 기원전 57년, 사로국의 왕이 되었어요. 이때 나라 이름은 서라벌, 사로 등으로 불렸고 왕에게는 '거서간'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그러다 서기 4년, 박혁거세의 아들이 남해왕이 되는데 이때 왕은 무당을 뜻하는 '차차웅'으로 불렸어요. 신라 3대 유리왕이 24년에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사금'이라는 칭호를 썼는데, 이때 이사금은 잇자국을 뜻합니다. 치아 개수가 많은 연장자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해서 붙은 호칭이지요. 아직 부족 연맹왕국 수준인 시기라 박 씨, 석 씨, 김 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었습니다. 5대 파사왕 때는 주변 소국을 병합하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아갔어요. 초기에는 박 씨와 석 씨 계열이 주로 왕위에 올랐는데, 17대 내물왕 대부터는 줄곧 김 씨가 왕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1. 나라의 기틀을 다진 법흥왕
내물왕 때 신라에 왜군이 쳐들어오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지원군을 보내줍니다. 그 덕에 신라는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고구려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어요. 21대 소지왕 때는 나라가 안팎으로 고달팠습니다. 나라에 천재지변이 닥친 가운데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을 휘저었고, 왜군은 해안가로 쳐들어와 온갖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로 남진 정책에 열을 올리고 있었어요.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은 5세기, 신라 소지왕과 백제 동성왕은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나제동맹으로 뭉칩니다.
6세기로 진입하면서 신라는 드디어 어깨를 펴기 시작합니다. 국력을 키우는 시작점에서 국가의 기강을 잡은 왕은 22대 지증왕이에요. 지증왕 때 국명이 신라로 확정되고 비로소 왕이라는 호칭을 쓰게 됩니다. 더 이상 마립간 같은 신라식 호칭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요. 내부 체제를 정비하고 국내에 주, 군, 현을 설치합니다. 512년에는 이사부가 울릉도 지역에 있던 부족국가인 우산국을 정벌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514년, 법흥왕이 23대 왕으로 등급합니다. 지증왕의 배턴을 넘겨받은 법흥왕은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했는데, 현재의 국방부와 같은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했으며, 관리의 관복 색상으로 등급을 구분했습니다. 국가의 군대와 법이 생기고 관직이 정리되면서 체계가 척척 잡혀갔지요. 534년에는 '상대등'이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서 나랏일을 총괄하게 했는데, 상대등은 귀족 회의의 우두머리로 오늘날 총리와 같은 최고위 관직이었습니다.
법흥왕은 안으로 과감히 개혁을 펼치면서 바깥으로 영토까지 확장했어요. 532년에 금관가야가 신라로 병합되었지요. 법흥왕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누가 뭐라 해도 불교 공인일 겁니다. 이미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가 들어온 이후로 신라에 불교가 퍼져있긴 했는데, 전통적으로 토속신앙을 믿고 있던 데다 귀족들의 거부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 덕분에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국가에서 공식 인정한 불교는 왕권을 받쳐주는 새로운 이념이 되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의 순교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왕이 위엄을 갖추고 무시무시한 형구를 벌려놓고 군신을 불러 물었다. "내가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대들은 일부러 못 하게 하는가." (중략) 왕이 이차돈을 불러 문책하였다. 이차돈은 얼굴색이 변하여 아무 말도 못 하였다. 대왕이 분노하여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옥리가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았고, 하늘이 침침하여 햇빛이 흐려지고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꽃이 내려왔다. 왕은 슬퍼하여 곤룡포를 적시었고 재상들은 놀라서 땀이 관까지 내번 지었다.
2. 한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
법흥왕 다음으로는 신라의 명실상부한 전성기 왕, 진흥왕이 등장합니다. 진흥왕은 불교에 토속신앙을 더한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팔관회'입니다. 모두가 함께 즐기던 팔관회를 통해 불교는 호국 종교로 자리 잡게 됐고 그 속에서 신라인들이 함께 뭉칠 수 있었어요.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한강 일대의 주도권은 신라가 장악하게 됩니다.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해 덤빈 대가야를 정복해서 가야의 종말을 고했고, 옛 옥저와 동예 땅까지 차지해서 영토를 대폭 넓혔습니다. 하늘을 뚫어버릴 기세의 진흥왕은 정복지를 돌아보면서 창녕, 북한산, 황초령 등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어요 '순수'란 왕이 나라를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때 화랑제도가 시행됐다고 전하는데, 청년 집단인 화랑도에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국가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그 외에도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했으며, 신라 최대 사찰인 황룡사를 지었습니다.
진흥왕 이후 632년에는 진평왕의 딸이 한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합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입니다. 한국사에서 여왕이 출현한 국가는 오직 신라뿐이에요. 신라의 여왕은 총 3명으로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입니다.
여왕과 더불어 '골품제'는 신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에요. 골품제는 혈통에 따라 골과 품으로 급을 정하는 신라 특유의 신분제도입니다. 신라가 성장하면서 점차 주변 소국을 병합할 때, 병합한 소국들의 지배층을 신라의 중앙 귀족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이때 각각의 세력에 따라 등급을 정하면서 골품제가 발전한 거지요. 골품제의 최고 신분은 성골과 진골이고, 그 밑에는 6두품부터 1두품까지 6등급으로 나뉘었어요. 신라에서는 원래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더 이상 성골 남성이 없었으므로 화백 회의에서 진평왕의 딸 덕만을 여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신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여왕인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세웠는데, 무려 1,5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습니다. 고대국가에서 하늘을 살피고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지요. 또한 선덕여왕은 80미터에 이르는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웠는데 9층인 이유는 주변 9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집니다.
당태종은 신라가 여인을 왕으로 섬기니주변국이 업신여기는 거라며 무시하기도 했지만, 선덕여왕은 당나라와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반도에선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이 터졌고, 백제의 공격이 절정에 달하면서 신라는 대야성을 함락당하고 말았어요. 마음이 급해진 선덕여왕이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도움을 청했어요. 고구려 연개소문은 죽령 서북 땅을 다시 내놓으면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김춘추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감금됐던 김춘추는 간신히 탈출해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신라의 명장 김유신은 전쟁터를 휘젓고 다니며 활약했습니다. 647년,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선덕여왕의 뒤통수를 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김유신이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우면서 입지를 다졌어요. 그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사촌 동생이 28대 진덕여왕으로 등극합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쉴 새 없는 공격에 어지러웠던 신라는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냅니다. 결국 648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을 맺었어요. '나당 연합'이 결성된 것입니다.